배달 음식과 `르 그랑 누아 피노 누아'. 임승수 제공
와인이 주류 시장의 대세로 떠올랐다. 코로나19로 인한 집콕과 홈술의 증가 때문이다. 수요가 늘어난 만큼 소비자들은 정보에 목마르다. 권은중 음식평론가와 임승수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저자가 4주에 한번 화이트&레드 콘셉트로 화이트·레드와인 그리고 이에 어울리는 안주를 추천한다. 첫회는 일반적인 각 와인에 대한 소개로 시작한다.
내 인생이지만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전기공학·반도체 소자로 학사, 석사 학위를 받고 연구원으로 직장 생활을 했지만, 대학 때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고 받았던 충격의 여파가 계속되어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마르크스주의 책을 쓰는 사회과학 작가가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호주머니 사정은 소작농 수준인데, 하필이면 혓바닥의 섬세함과 탐욕스러움은 합스부르크 왕가 뺨친다. 때는 2015년 9월6일이었다. 대책 없이 해상도만 높은 혓바닥이 와인 한 병을 만나 진도 9.0의 지진을 경험했다. 이후 유전자 레벨의 본능에 몸을 맡겨 가산을 탕진했고, 얼마 전 짠내 나는 와인 체험 에세이까지 냈다.
그런 나에게 <ESC>로부터 레드와인 추천 글 납품 의뢰가 왔다. 이 시점에 이런 얘기 하기 뭐하지만, 나는 경험치가 쌓일수록 화이트를 더 찾게 되었다. 레드에 비해 다양한 음식과 두루두루 어울리고, 무엇보다도 한식과의 궁합이 좋기 때문이다. 와인에 음식을 맞추지 않고 음식에 와인을 맞추면서부터는 더욱 화이트로 쏠리게 되었다. 하지만 일단 ‘프로’ 작가인 이상 클라이언트의 요구가 최우선이다. 오늘부터 레드파로 전향했다. 코로나로 인한 경제적 절박함이 인간의 취향도 바꿀 수 있음을 ‘내돈내산 체헐리즘(체험+리얼리즘)’ 와인 글로 증명하겠다.
이번에 추천할 와인은 ‘르 그랑 누아 피노 누아’(Le Grand Noir Pinot Noir)다. 이마트 영등포점에서 1만원대 초반의 가격으로 구매한 프랑스 레드와인이다. 피노 누아르(피노 누아)는 우아하고 세련되기로는 으뜸가는 품종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으로 평가받는 로마네 콩티가 바로 금싸라기 밭에서 애지중지 키운 최고급 피노 누아르로 만들었다. 다만, 애호가들이 하는 얘기가 있다. 싸고 맛있는 피노 누아르는 없다고. 그런데, 이 피노 누아르? 싸고 맛있다!
몇년 전 감자전이었나 호박전이었나 아무튼 부침개를 우적우적 씹다가 이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켜고서는 ‘오잉?’ 하면서 새삼 라벨을 들여다보았다. 너무 맛있어서! 프라이팬 위에서 기름 범벅으로 엎어치기 몇번 당한 부침개의 느끼함을 이 와인의 적당한 산미가 잘 잡아주어 인상적이었다.
얼마 전 이 와인과 다시 만났다. 곁들인 배달 음식은 해산물 오일 파스타, 해물 치즈 떡볶이, 먹물 해산물 파에야, 목살 큐브 스테이크 김치볶음밥 이렇게 네가지였다. 초등학생 딸 둘이 포함된 4인 가족의 저녁 식사다 보니 와인과의 궁합을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날씨도 덥고 살짝 시원하게 마시면 좋겠다 싶어, 냉장고에 뒀다가 적당한 시점에 꺼내어 온도 맞춰 마시기 시작했다. 여리여리한 체리, 딸기류의 향이 모자람 없이 피어오르고, 무엇보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질감이 꽤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저렴한 피노 누아르가 코와 입을 동시에 만족하게 하기는 쉽지 않은데, 이 기특한 놈은 그걸 해내네.
이것저것 집어 먹다가 임의의 시점에 와인을 털어 넣어도 딱히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음식과 두루두루 잘 어울린다는 의미다. 와인의 풍미 자체가 가볍고 은은해서 음식을 받쳐주는 조연 역할로 제격이다. 다만 몇년 전에 먹었던 기름진 부침개와의 궁합이 더 인상적이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임승수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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