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코 데 베요타 100%’ 하몬과 스페인 토착 품종 템프라니요 와인.
해외여행이란 무엇인가. 오감이라는 다섯가지 창을 통해 대한민국의 것이 아닌 그 무언가를 흠뻑 영접하는 것일 테다. 에너지 소모 최소화를 추구하며 방구석을 선호하는 나조차도 갑갑해서 비행기 타고 싶을 정도이니, 코로나로 해외여행을 못 해 좀이 쑤시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는 다섯가지 감각기관 중 특정 기관만이라도 물 건너의 그 무언가를 탐닉할 필요가 있다. 그래! 혓바닥만이라도 해외여행 좀 해보자.
문득 하몬과 템프라니요의 조합이 떠올랐다. 스페인 돼지 뒷다리 생햄(하몬)에다가 스페인 토착 품종 와인(템프라니요)을 곁들인다면, 미각과 후각에 한정했을 때 제법 근사한 스페인 여행 아닌가. 예전에 마트에서 하몬을 사 먹은 적이 있는데, 짠데다가 맛도 별로여서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는가 싶었다. 그런데 우연히 본 글에서 하몬은 저렴이와 고급품이 천양지차라며 많은 한국인이 고급 하몬의 진면목을 모르는 게 아쉽다는 의견을 접했다.
그러면 내가 먹었던 건 진정한 하몬이 아니었단 말인가? 호기심이 동해 알아보니 하몬에도 등급이 있더라. 도토리만 먹이며 제대로 방목한 이베리코 흑돼지, 그것도 부모가 모두 이베리코 흑돼지인 순종을 최고로 치는데, 이놈으로 만든 하몬이 ‘이베리코 데 베요타 100%’라는 최고 등급이란다. 게다가 기계로 썰지 않고 숙련자가 직접 손으로 써는 게 맛이 더욱 뛰어나다는데.
‘이베리코 데 베요타 100%’ 하몬을 직접 썰어주는 곳을 수소문해서 서울 마포구 ‘하모네꼬’를 찾아냈다. 하몬 40g(400g 아님)을 무려 3만1600원에 구입했는데, 얇게 썰어내는 모습이 제법 멋스러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곁들일 템프라니요 와인은 이마트 영등포점 매장 매니저분이 추천한 ‘아사 크리안사’를 선택했다. 와인 스펙테이터 100대 와인에 세차례나 선정될 정도로 가성비 와인인데다가, 마침 20% 할인행사라 1만9800원이라는 믿을 수 없는 가격에 나와서다.
하몬은 한참 냉장고에 뒀다가 꺼낸 후 20~30분 기다려 지방이 녹기 시작하면 먹으란다. 정확한 타이밍에 한점 집어 들어 씹기 시작했다. 존득하면서도 부드러운 (돌돔 회 같은) 식감에, 잘 스며든 짠맛이 진한 감칠맛과 어우러져 깊은 풍미를 자아낸다. 정성스럽게 끓인 소고기뭇국을 훌쩍 뛰어넘는 감칠맛 끝판왕이구나! 미식가임을 자처하는 둘째(초3)가 첫 한점은 모데라토의 페이스로 집어먹더니 갑자기 프레스토로 속도를 끌어올린다. 어쩌면 저렇게 내 눈치 안 보고 민망한 속도로 흡입할까. 과연, 이것이 가족이구나.
고기를 씹었으면 이제 와인을 드셔야지. 오호. 역시 ‘아사’답다! 산미 훌륭하고, 나름 묵직한 바디감에 균형감을 깨지 않는 적절한 타닌! 밸런스 좋구나. 하지만 무엇보다도 연기 향이 일품이다. 훈제 음식에서 느낄 법한 잔잔한 연기 향이 올라오는데, 앞서 지나간 하몬의 감칠맛과 절묘하게 뒤섞여 훌륭한 조화를 이뤄낸다. 서로 반갑드나? 누가 동향 출신 아니랄까 봐. 그나저나 코와 혀만 호강하니 잔뜩 샘이 난 안구가 나를 타박하네. 억수로 미안하구먼. 코로나 풀리면 서운한 안구를 달래주기 위해 생빚을 내서라도 스페인 한번 가야 쓰것다.
글·사진 임승수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저자 reltih@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