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과 향이 기가 막힌 리카솔리 브롤리오 키안티 클라시코 리세르바. 임승수 제공
지난 5월27일 정오에 우리 부부는 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와인이 곁들여진 식사를 대접받았다. 지인은 초대 의사를 밝히면서 당일 내놓을 와인 두 병의 사진을 미리 보내줬는데, 살펴보니 모에 에네시 루이 뷔통(LVMH) 그룹의 최저가 명품으로 일컬어지는 화이트 와인 ‘클라우디 베이’(할인가 4만원대)에다가 프랑스 보르도 페사크레오냥 지역의 준척급 레드 와인(앞의 와인보다 더 비쌈) 아닌가! 우리 부부에 대한 이런 접대는 어느 모로 보더라도 호의와 선의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나와 아내는 비인기 분야의 책을 꾸역꾸역 쓰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작가이고, 당연히 김영란법 대상도 아니다. 기름칠해 봐야 기대할 만한 게 하나도 없는 부류이니, 사심 제로의 따뜻한 초대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편하게 빈손으로 오라고 했지만, 사람이 최소한의 염치는 있어야지. 솔직히 빈손 손님과 양손 가득 손님 중 어느 쪽이 호감인가. 답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게다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팃포탯(tit for tat)이 생존과 진화에 있어서 최고의 전략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지 않나. 이래저래 선의에는 선의로! 우리 부부의 마음을 유물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거실의 와인 셀러를 뒤졌다. 그래, 이놈을 가져가자.
리카솔리 브롤리오 키안티 클라시코 리세르바. 산조베세 품종 100%로 만든 이 이탈리아 와인을 고른 이유는 1141년에 설립된 리카솔리 와이너리의 명성, 그리고 상대에게 생색낼 수 있는 가격(할인가 5만원대)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맛과 향이 기가 막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마셨던 이탈리아 키안티 와인은 중간이 빈 것 같은 앙상한 신맛이 대체로 아쉬웠는데, 리카솔리의 이 와인은 살집이 꽉 찬 풍부한 신맛에 키안티 와인을 선호하지 않는 나조차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동안 여러 병 마시면서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으며, 함께 마신 사람들 모두가 극찬한 신뢰도 100% 와인.
지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에서 와인을 꺼내며 앞서 언급한 내용을 읊어댔다. 상대방의 얼굴에 웃음기가 도는 걸 보니 역시 가져오길 잘했구나. 첫 와인으로는 지인이 준비한 클라우디 베이를 열어서 마시는데, 옆에 앉은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너무 맛있다”고 빠른 속도로 잔을 비운다. 원체 맛있기로 유명한 와인인데다가, 무려 남이 사준 거 아닌가! 다음 와인으로 드디어 리카솔리를 열었다. 지인의 아내가 향기를 음미한 후 한 모금 마시더니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맛있다고 탄성을 내뱉는다. 남이 사준 와인이 맛있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구나. 이런 건 누가 뇌과학으로 규명하면 흥미로울 텐데.
제일 비싼 보르도 페사크레오냥 지역 와인을 마지막으로 열었지만, 그때는 다들 인지 및 언어 능력의 현격한 저하가 발생한 시점이었다. “지가 을마 전에 쇼페르트(슈베르트) 죽흥곡 연숩허다가 팔이 너무 아파쓰요.” “남펴니가 자다가 방구를 너무 마니 껴서 공기가 오염된다는.” 간만에 엔도르핀과 도파민이 로마 트레비 분수처럼 뿜어나오는 친교의 시간이었지만, 딱 하나 아쉽네. 제일 비싼 와인을 먼저 마셨어야 하는데 말이야. 기억이 안 나잖아.
※권은중·임승수의 화이트 vs. 레드 칼럼을 마칩니다. 두 필자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