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의 식물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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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의 단절은 나이가 들면서 누구나 맞닥뜨리는 과정일 것이다. 늘 유지되리라 믿었던, 식물로 치자면 하던 대로 줄기를 위로 뻗으면 되리라 여겼던 그 무심한 안정을 끊고 들어오는 관계의 파국 같은 것.요즘 멜라노크리섬이라는 식물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우리 집에 온 멜라노크리섬은 잎 세장을 지녔던 소박한 시절보다 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껏 낸 새순을 제대로 펼치지 않는다든가 줄기를 가늘게 내어 자꾸 위로만 올라간다든가 하면서 웃자라고 있다. 그래도 자라고 있기는 하니까 그러면 되지 않았나 싶어 놔두었는데 어느새 지지대를 넘어갈 정도가 되었다. 줄기만 뻗었을 뿐 새잎 하나 제대로 펼치지 않은 채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어느 날 이건 아니지,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자라는 건 자라는 게 아니야,라고. 때마침 “가만히 놔두면 식물의 직진성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는 경고를 어딘가에서 본 참이었다. 나는 줄기를 뻗어 어딘가로 또 올라가려는 멜라노크리섬의 생장점을 큰맘 먹고 잘랐다. 생장점은 간단히 말하면 잎이 나는 부분이고 보통 가지치기는 생장점의 조금 윗부분을 자르면서 한다. 그러면 식물은 그 방향으로 자라는 것을 멈추고 기존의 잎들을 풍성히 키우거나 분화시키는 데 열중한다. 생장점이 잘린 멜라노크리섬은 며칠간은 변화가 없었다. 일종의 모색을 하는 것 같았다. 앞으로 어디를 키워야 할지 어디로 뻗어 나가야 할지 가만히 침잠해 고민해보는 것. 그런데 그건 지난 몇 년간의 내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오디오북 녹음 때문에 산문집을 다시 찬찬히 읽게 됐는데 “몇 년간 세상은 점점 나빠졌지만 역설적으로 좋은 사람들이 많아졌다”라는 문장에 눈길이 갔다. 오륙년 전 쓴 그 문장은 어쩐지 내 것 같지가 않았다. 세상이 더 나아졌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지금은 내 곁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쓰지는 않을 듯하니까. 이런저런 개인적 상황들에다 팬데믹까지 겹쳐 관계들이 떨어져나간다고 느낀 지 오래되었다. 가까웠던 사람들이 점점 그렇게 멀어지는 건 세상을 향해 뻗고 있었던 가지 하나하나가 잘리는 듯한 아픔이기도 했다. 하나가 잘릴 때마다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호의, 기대, 희망, 신뢰를 재조정해야 했고 그건 매번 혼자가 되는 일이었다. 가지치기 후의 멜라노크리섬처럼 멈춰 서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막막하게 물어야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물론 나만 유독 그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작가 생활을 하며 점점 더 고립감을 느껴가던 한 동료는 선배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왜 자꾸 주변 사람들을 한둘씩 잃어갈까요?” 대답은 이랬다. “글쎄요, 그게 한둘이면 다행이지요.” 우리는 그 얘기를 하며 웃었지만 그렇다고 착잡한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인간관계의 단절은 나이가 들면서 누구나 맞닥뜨리는 과정일 것이다. 늘 유지되리라 믿었던, 식물로 치자면 하던 대로 줄기를 위로 뻗으면 되리라 여겼던 그 무심한 안정을 끊고 들어오는 관계의 파국 같은 것. 다들 그런 고비를 어떻게들 넘으며 호기롭게 나이 들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렇게 해서 무뎌지고 있는 것일까. 며칠 지나 멜라노크리섬은 다른 생장점들에 새순을 내기 시작했다. 아기 손톱만한 새순에 싱그러운 연둣빛이 돌 때 내 마음은 불이 탁 켜진 듯 환하게 밝았다. 대화가 통한 기분이었다. 가위질과 물주기 그리고 햇볕으로 구성된 이 대화의 결과가 다른 방향으로의 성장이라는 점이 반가웠다. 속은 텅 빈 채 외피만 늘리는 건 결국 스스로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는 내 진심을 식물이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제 식물을 통해 확인하게 된 그 진실을 내 삶에 적용시키면 될 일이었다. 여름이 끝나가는 요즘 내 방 식물들은 어느 때보다 상태가 좋다. 처음 햇볕이 잘 들지 않아 뭔가 식물들의 고난을 예고하는 변방의 식물 수용소처럼 느껴지던 방이었지만 어느덧 식물들은 적응을 해나갔다. 그사이 베고니아는 몸집을 두배나 늘려 더 큰 슬릿분으로 화분 갈이를 해주었다. 인간인 나는 파악할 수 없는 이 공간의 특질과 에너지를 찾아내 그것에 유순하게 적응해 성장한 식물들. 나는 계절이 지나는 동안 내 가까운 존재들이 그것을 해냈다는 생각을 했고 은근한 용기를 얻었다. 더 이상 줄기를 뻗지 않고 변화를 완수할 듯하던 멜라노크리섬은 그러나 다시 위로 위로 전진해가기 시작했다. 가장 윗부분의 생장점에 잎을 틔우더니 그 잎이 자라기도 전 다시 위로 또 다른 잎들을 분화시켜나갔던 것이다. 앞으로 직진하지 말라고 하니까 좀 우회해서 직진하는 셈이랄까. 나는 우리가 나눠야 할 대화가 아직 남아 있구나 생각하며 또 생장점을 잘랐다. 멜라노크리섬은 그렇게 다시 ‘얼음’ 상태가 된 채, 앞으로 어디에 힘을 쓸지 어디에 이 소중한 생을 사용할지 모색 중이다. 새순들 모두 풍성한 잎으로 키우면 좋겠지만 여전히 웃자라더라도 그리 큰일은 아닐 것이다. 다시 하면 되니까. 생각해보니 그렇게 여러번 자르는 일은 마음을 여러번 고쳐먹는 일과 같았다. 그러니 어렵고 그러니 우리에게는 새순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있는 것이다. 김금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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