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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2월은 연말다운 날들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크리스마스에 관한 일곱 편의 단편을 묶어 신간을 냈고 성당 미사에 참석해 사람들과 성탄을 함께 기다리고, 몇 개의 약속을 잡아 소박한 파티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데, 이 모든 과정이 최근 코로나19를 앓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물론 몇 주 만에 재확진되는 경우도 있어 조심해야 하지만 당분간 나는 어쨌든 가장 안전한 사람이니까.
밖은 겨울이지만 집안에서는 난방을 하기 때문에 대부분 식물들은 별다른 변화 없이 자라던 대로 자란다. 동백은 꽃봉오리를 조금씩 더 두텁게 피어 올리며 겨울의 밀도를 높여가고 여름을 힘들게 넘겨 걱정했던 부겐베리아도 지난해와 다름없이 흰 포엽을 아름답게 피웠다. 발코니 구석에서 볕 조금, 바람 조금으로 살고 있던 남천나무도 줄기들을 소복이 올려 사년차 식물생의 고요한 기품을 지니게 됐다. 동네 꽃집에 진열되자마자 사 들고 온, 크리스마스 대표 식물 포인세티아도 겨울 분위기를 내며 잘 자라고 있고 오늘 오후에는 크리스마스트리를 위해 구입한 율마가 도착할 예정이다.
원래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하던 우리 집 아라우카리아는 올해 생장이 썩 좋지 못했다. 새 가지는 나지 않았고 기존 가지들은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겨 잘라내야 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니까 잠깐은 괜찮겠지 하고 전구를 둘렀더니 남은 가지마저 부러지기 직전, 하는 수 없이 별과 사슴 오너먼트 같은 가벼운 장식만 남기고 다 떼어내야 했다. 요즘은 조화 트리도 예쁘게 잘 나오고 사실 살아 있는 것에다 무게를 더하느니 원래 장식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품에 하는 편이 나은 점도 있지만 우리 집 식물들 사이에서 조화 트리는 너무 도드라져 보일 것 같았다. 내 눈에는 근사하지만 사실 우리 집 식물들은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상태이니까. 그런 자유롭고 호방한 분위기 속에 마른 잎 하나 없는 조화 트리가 들어서면 식물들이 도리어 빛을 잃을 듯했다. 결국 새 식물을 들이기로 결심했다. 외국에도 수출돼 트리 나무로 각광받는다는 구상나무를 사고 싶었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고민 끝에 나는 연둣빛 율마를 올해 크리스마스 나무로 선택했다.
지난 주말에는 친구네 가족과 송년 모임을 가졌다. 어른 넷과 씩씩한 어린이 한 명이 참석한 자리였다. 모처럼 어른들끼리 모일까 싶어 친구는 어린이에게 할머니 댁에 가서 시간을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지만 어린이는 송년 모임에 자기도 참석하고 싶다며 그 제안을 당당히 거부했다. 그날은 내가 물꽂이 해 키운 베멜하(베루코섬 멜라노크리섬 하이브리드종)를 친구 집에 드디어 가져가는 날이기도 했다. 포트로 옮겨 심은 뒤 한 달쯤 우리 집에서 적응기를 거친 베멜하는 이제 내 손을 떠나 어린이가 있는 집에서 새 삶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니까 잘 보이라고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 토퍼도 달고 에어캡으로 화분을 조심조심 포장했다. 키웠던 식물을 내보내려니까 마음 한편이 살짝 아려왔다. 그런다고 모든 걸 내 손에 다 쥐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리니까. 어떤 결별들은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든다. 아니, 어떤 결별만이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든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라면 성장도 기쁨도 없을 것이다.
식당과 펍을 거쳐 어른들과의 파티를 잘 이어가던 어린이는 이제 자기 집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날은 춥고 음식도 배불리 먹었으니까 이제 집으로 가서 편안히 있자고. 친구가 부담스러울까 봐 괜찮다고 했는데 팔을 붙들고 “이모, 우리 집에 가자, 가서 자고 가요.” 하는 바람에 못 이기는 척 아파트까지 올라갔다. 친구네 집에서는 밤의 인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내 근원이자 사실상 내 모든 것을 만들어준 도시, 지금은 떠나 있지만 당연히 돌아올 곳이. 크리스마스 파티란 결국 그렇게 내게 남아 있는 것들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열리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잎색이 정말 예쁘다, 잘 키워볼게.”
친구는 다행히 화분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근데 이름이 뭐라고 했지? 하고 물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고 나는 이렇게 기억력이 떨어진 건 다 코로나 탓이라며 인터넷으로 검색해 겨우겨우 이름의 약자가 아니라 전체 이름을 알려주었다. 감자튀김을 두 번이나 튀기고 와인을 쏟고 중간에 어린이가 자신의 일기를 가져와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주는 동안 농담과 회한이 적절히 섞인 다정한 시간이 지났고 자정쯤 친구 집을 나섰다. 작은 떡갈고무나무 화분과 함께였다.
“이거 상태도 안 좋고 볼품이 없는데 괜찮겠어?”
친구가 약간은 걱정스럽고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산 지 얼마 안 된 떡갈고무나무가 시들시들하다는 말을 듣고 내가 길러보겠다며 나섰던 것이다. 물론 내게 그런 ‘그린 핑거’로서의 자질이 있는가는 확실하지 않았다. 집안 식물들이 용케 잘 자라고 있지만 기억조차 못 할 정도로 많은 식물들을 보낸 것도 사실이니까. 나라면 꼭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고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건강하게 살려서 다시 돌려줄 수 있다면 친구는 가드닝을 하다가 문제가 좀 생겨도 해결이 되는구나 할 테고 슬프게도 살려놓지 못한다면 무려 식물 에세이까지 연재하는 내 친구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할 터였다. 어느 쪽을 봐도 나쁠 게 없는 일이었다.
2년 넘게 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쓰면서 가장 전달하고 싶었던 마음도 바로 그런 형태의 안도였다.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식물들이 피고 지는 숱한 반복들을 하며 가르쳐주는 것은 뭐 그리 대단한 경탄이나 미적 수사들이 아니라 공기와 물, 빛으로 만들어낸 부드럽고 단순한 형태의 삶의 지속이라고. 그러니 연재를 읽어주신 독자분들께도 그런 식물의 녹록(綠綠)함이 언제나 함께하기를, 녹록지 않은 순간에도 고개를 돌려 나무 한 그루, 잎 한장에 시선을 맞출 수 있는 용기가 마음속 포트에 늘 담겨 있기를 바란다. 바로 그 전환의 용기야말로 식물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빛나는 ‘마음’이라는 것을 한해의 끝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 기쁘게 깨닫고 있다. 감사드린다.
김금희 소설가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