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나무 [ESC]

등록 2022-10-22 11:00수정 2022-10-22 11:38

김금희의 식물 하는 마음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신청. 검색창에 ‘에스레터’를 쳐보세요.

오스트레일리아(호주)의 그림책 작가 프레야 블랙우드의 <비밀의 숲 코끼리나무>에는 ‘나무’와 ‘동물’ 사이의 존재들이 등장한다. 윗부분은 코끼리이지만 다리는 나무둥치로 이루어졌거나 무성한 나뭇가지들이 낙타의 볼록한 혹을 이루고 있거나 하는 식이다. 모든 대상에게 자신의 상상을 불어넣는 아이들에게는 그것의 정체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규정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자신들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가 그 존재를 결정한다. 나무는 얼마든지 코끼리나 낙타 같은 움직이는 존재가 될 수 있고 동물도 마치 나무처럼 삶의 에너지를 스스로 땅으로부터 길어 올리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자기 존재를 바꾸어나가는 유연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유연한 가능성이 공사로 곧 뽑혀나갈 위기에 처한 이 ‘동물 나무’들의 운명을 바꿔놓는다.

가족과 친구들에게서도 얻지 못한 위로를 나무에서 찾는 이 그림책 속 아이처럼 내게도 그런 나무들이 있었다. 어려서 살던 집의 목련나무가 그랬다. 아홉살까지 골목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았던 나는 그 무렵에 관한 진한 향수를 지니고 있다. 겨울이면 안방에 석유난로를 켜두어야 할 정도로 방한이 안 되는 집이었지만 거기에는 어린아이를 즐겁게 하는 많은 것들이 있었다. 작은 화단이 놓인 앞마당이 있었고, 비밀을 잔뜩 품은 듯한 지하실이 있었고 부엌 뒤편에는 목련나무가 자라는 좁은 뒷마당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목련나무는 거기 갇혀 있는 셈이기도 했다. 어른 두명이 겨우 서 있을 만큼 좁은 면적에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목련나무는 잘 자랐고 나는 그 나무를 자주 들여다봤다. 거기에 나무가 있다는 사실은 내게 어떤 안정감을 주었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알아준다는 기분 좋은 안락함이었다. 그림책을 읽으며 한동안 잊고 있었던 목련나무를 떠올렸다. 저녁에 해가 길게 들어오면 그 빛을 달고 이거 어때, 하며 가지를 뻗어 보이던 나무를 말이다.

아주 오래고 좀처럼 멈추지 않는 부모의 감정싸움 속에 살았던 나는 집에서 큰 갈등이 일어나면 주눅이 들어 느릿느릿 땅만 보며 등교하곤 했다. 자연히 상상 속에서만 안전과 안락과 위로를 느끼곤 했다. 때론 어떤 풍경들이, 책이 그런 상상으로 가는 문 역할을 해주었다. 목련나무가 있던 집을 떠나 십년이 넘게 살았던 아파트에서는 단지 안 나무들이 그런 나를 지켜봐주었다. 처음에는 앙상하고 볼품없었던 나무들은 내가 스무살이 될 때쯤에는 제법 울창하게 우거진 성목들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나무들이 보이는 작은 방에서 열심히 자랐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책장을 펼치면 언제나 열리던 지금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때로 내 글을 읽을 독자들을 어떤 모습으로 그려보는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자연스레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지금 당장 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앞으로 다른 미래를 살 가능성이 있다면 아이는 그 순간을 견딜 수 있다. 코끼리나무를 상상하며 견딜 수 있고 외계인을 상상하며 견딜 수 있고 아름다운 우정이나 사랑, 어떤 신뢰를 상상하며 견딜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많은 책들이 궁극적으로 가르쳐준 것은 그런 삶에 대한 상상이었다. 그 힘으로 어떻게든 현재를 통과해내겠다는 분명한 의지 같은 거였다.

얼마 전 집에서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자연스레 그때 나를 괴롭게 한 세세한 악몽들이 떠올랐고 점점 흥분해 말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 시절 슬픔에 대해서는 정말 말하기도 싫어.”

어린 시절 준비물을 해 갈 돈도 없었다던 친구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순간 나는 말을 멈췄다. 최근 들어 나 자신에 대해 덜 생각하기로 결심했는데 실천은 아직 요원해 보였다. 내가 그 결심을 한 건 자기의 작은 자아에 집착하는 사람은 오로지 ‘두려움에 가득 찬 자기 보호’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독일의 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오이겐 드레버만의 말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라는 좁은 면적에 갇히고 싶지 않았고 내가 본 나무들처럼 더 넓고 높은 성장을 향해 있고 싶었다.

우리는 가만히 마주 앉아 각자의 잔에 막걸리를 더 따랐고 묵묵히 건배를 한 다음 서로에게 별다른 위로를 하지 않고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그림책 속 아이가 상상계에서 발견한 존재뿐 아니라 얼굴을 맞대고 웃을 수 있는 실제의 친구를 찾아내 자기 성장을 이뤄낸 것처럼. 그런 우리를 발코니와 거실에서 몇해를 함께 보내고 있는 식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마음을 피신하는 데서 더 나아가 마침내 자기 마음을 결정하고 스스로 관리하게 된, 한때는 너무 작은 아이였던 어른들을 말이다.

김금희 소설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숲 여행도 하고 족욕도 하고…당일치기 기차 여행 1.

숲 여행도 하고 족욕도 하고…당일치기 기차 여행

‘미친놈’ 소리 들으며 3대가 키우는 정원, 세계적 명소로 2.

‘미친놈’ 소리 들으며 3대가 키우는 정원, 세계적 명소로

인간이 닿지 않은 50년 ‘비밀의 숲’…베일 벗자 황금빛 탄성 3.

인간이 닿지 않은 50년 ‘비밀의 숲’…베일 벗자 황금빛 탄성

쉿! 뭍의 소음에서 벗어나 제주로 ‘침묵 여행’ 4.

쉿! 뭍의 소음에서 벗어나 제주로 ‘침묵 여행’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 746자 5.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 746자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