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코로나19의 또 다른 공포는, 멀쩡했던 사람이 한동안 사회와 사람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을 만나며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에게 격리는 사실상 일시적인 사회적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 아무리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한 사회라고 해도 말이다.
코로나 감염이나, 확진자와 밀접접촉 등을 이유로 격리된 인구는 6월에 이미 200만명을 넘어섰다. 얼추 5200만명을 인구로 봤을 때, 100명 가운데 4명(3.84%)은 격리를 경험해봤다는 얘기다. 격리가 ‘남의 일’이 아닌 이유다. 지금도, 하루에 수천명의 격리자가 나오는 상황이다. 언제라도 내가 격리를 당할 수 있는 세상인 것.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코로나 팬데믹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슬기로운 격리생활’을 보낼 수 있을까. 확진자와 밀접접촉해 이달 초 11일 동안 자가 격리생활을 한 백문영 객원 기자가 자신의 격리 경험담을 풀었다.
우울하고 조심스러운 나날이 이어지던 때였다. 강화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언제 끝날지, 마음 놓고 놀고 먹고 마시던 시절이 다시는 오기나 할지 절망스럽기도 했다.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이렇게 와닿았던 적이 있던가? ‘오랜만에 술 한잔하자’는 친구의 전화가 뛸 듯이 반가웠고 설렜다. 기다렸다는 듯 달려나가 대낮부터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셨다. 단둘이어서 방심한 탓이었을까, 며칠 뒤 ‘그 일’이 벌어졌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아 코로나 임시선별진료소에 다녀오겠다’던 친구의 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출근 준비를 하고 있던 아침, 친구로부터 “확진 통보를 받았다”는 문자가 오기 전까지는 평온한 일상이었다.
가슴이 뛰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당장 출근은 어떻게 해야 하며, 직장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하고, 함께 사는 가족들은 또 어떡하지? 태산 같은 걱정을 뒤로하고 선별진료소로 향했다. 검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하루가 십년처럼 느껴졌다. 내 몸이 아픈 것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얽혀 있는 수많은 사람의 안위가 나 하나 때문에 위협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루가 지나서 나온 검사 결과는 다행히도 음성이었지만, 확진자와 밀접접촉을 했기 때문에 11일간의 자가격리 통보가 떨어졌다. 절망스러웠다. 온 가족과 함께 사는 집에서 자가격리라니, 좁은 방 안에서, 온종일 일주일도 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과연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못 하겠다고 안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가격리 통지서와 마스크, 체온계, 소독약, 쓰레기봉투 등 자가격리에 필요한 각종 물품이 집 앞에 놓였다. 자가격리자 안전 보호 애플리케이션을 스마트폰에 설치하고 전담 공무원을 배정받는 것부터가 격리의 시작이었다.
사실 멘붕이었다. 이제부터 뭘 해야 하지? 일단 첫째 날,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는 것부터 시작했다. 직장도 나가지 않는데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죄책감에서 한 행동이었다.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들을 이 기간에 몰아서 읽을 수도 있겠다는 착각도 들었다. 책을 사는 것만으로도 뭔가 이룬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뿌듯함은 잠시뿐. 둘째 날, 전날 주문한 책이 도착했는데도 에스엔에스(SNS)를 탐닉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고작 이틀 지났을 뿐인데 바깥세상을 그리워하다니, 죄책감이 또 밀려들었다. 침대와 혼연일체가 돼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책은 당연히 손에 잡히지 않았다.
셋째 날부터는 절대적인 운동량이 떨어져 먹는 양도, 식욕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끼니때마다 방문 앞으로 넣어주는 ‘사식’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을 무렵부터는 우울감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있으면 안 되겠다’ 싶은 생각에 요가 매트를 깔아 놓고 해보지도 않았던 ‘방구석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팔 굽혀 펴기, 스쾃, 제자리 뛰기같이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이라면 뭐라도 좋았다.
격리 중 먹었던 밥. 영양소를 골고루 챙겨 먹기 위해 노력했다. 백문영 제공
십여분 정도 땀을 쭉 빼고 나면 식욕이 되살아났다. ‘방 안에만 있으니 평소에 안 하는 것을 뭐라도 하게 되는구나’ 느꼈던 시기였다. 그 이후로는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다. 아침을 먹고, 에스엔에스를 들여다보고, 책을 읽고 운동을 하다가 낮잠도 한숨 자는 그런 여유로움 말이다. 절망감과 무기력함을 내려놓은 자리에 평온함이 스며들었고 강제적이었지만 쉽게 얻을 수 없는 휴가를 얻은 기분도 들었다. ‘그래,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하지만 평화로웠던 격리생활의 위기는 의외의 지점에 있었다. 간단한 음식과 간식거리는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주문할 수 있는 편한 세상인데, 술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매일 마시던 맥주도, 왁자하게 마시던 소주와 와인도 모두 그리웠다. 배송 서비스가 없는데다 대리로 사기도 쉽지 않은 것이 술이었다. 밤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딱 한잔’ 생각이 절실했다.
이런 나의 다급한 마음을 잠재워준 것이 전통주 주문 서비스였다. 일반 주류는 인터넷 판매가 금지되어 있지만 전통주는 다르다. 한국에서 만든 와인, 과실주, 증류주, 탁주 같은 술은 온라인에서도 쉽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각종 와인과 증류주를 양껏 주문했다. 바로 다음날 배송된 술들을 책상 위에 쭉 늘어놓고 있으니 방문 밖 세상의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와인과 증류주를 한 잔씩 걸치고 자는 밤은 유난히 즐거웠다.
전통주는 인터넷에서 주문을 할 수 있어 외로움을 이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백문영 제공
드디어 마지막 날, 선별진료소에서 음성 판정을 받은 뒤 ‘출소’했을 때의 기분은 남달랐다. 일주일 넘게 머물렀던 방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분리 배출하고 바깥세상의 공기를 맡았을 때의 짜릿함을 여전히 기억한다. 자랑할 일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지만, 처음의 불안했던 마음과는 달리 평온하게 보낸 자가격리 기간에서 배운 점도 많다. ‘명상’이라는 거창한 행위까지 가지 않더라도 나를 들여다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 사회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다 해도 크게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도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시기를 통해 알았다.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감을 버리고 나서 평온함이 찾아왔다. 외로운 격리생활, 슬기롭게 이겨내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의지였다.
그렇다고 다시 격리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다. 11일이 111일처럼 느껴졌으니까. 격리생활을 겪으며 코로나 바이러스에 호되게 당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백신을 맞아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차 접종자가 70%를 넘어설 만큼 백신을 맞는 이도 늘어나는 추세다. ‘백신 휴가’도 흔한 일상이 되지 않았나.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이 꽤 많은 것으로 안다. 특히 젊은층에선 ‘걸려도 안 죽는다’며 호기를 부리기도 한다. (나도 그런 생각이 전혀 없던 건 아니다) 하지만 격리생활을 해보니, 실감하게 됐다. 일상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또 ‘나 하나쯤이야’란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일상의 회복은 나 혼자 격리된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백문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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