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ESC] 햄버거와의 조화, 예상보다 훌륭해!

등록 2021-09-30 04:59수정 2021-09-30 10:13

임승수의 레드
매끄러운 타닌이 입안 씻어주는 미국의 카베르네 소비뇽
연필심 향과 흙 향, 마리에타 아르메 카베르네 소비뇽. 임승수 제공
연필심 향과 흙 향, 마리에타 아르메 카베르네 소비뇽. 임승수 제공

와인과 특정 음식의 조합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장면은 영화 <사이드웨이> 후반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영어 교사이자 와인 애호가에 이혼남인 주인공 마일스는 미련이 남아 잊지 못하는 전처 빅토리아가 재혼하고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인생 역전을 꿈꾸며 심혈을 기울여 쓴 소설 원고는 여러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았고, 인생의 쓴맛과 와인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며 조심스럽게 사랑을 키워오던 마야와는 오해로 인해 관계가 틀어졌다.

최악에 최악이 겹쳐 실의에 빠진 마일스는 최고의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애지중지 보관하던 샤토 슈발 블랑 1961 빈티지를 꺼내 들고 동네 햄버거집에서 서푼짜리 햄버거를 주문해 포도맛 웰치스처럼 마셔댄다. 샤토 슈발 블랑은 평범한 빈티지도 100만원에 이르는 고가인데다가 1961 빈티지는 포도 작황이 유례없이 좋은 해라 수백만원에 거래될 정도로 뛰어난 평가를 받는다. 와인에 조예가 있는 사람은 이 장면을 보며 깊은 장탄식을 내뱉는다. 주인공 마일스가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레미콘 콘크리트처럼 구강 속으로 들이부어져 햄버거와 뒤섞이는 슈발 블랑 1961 때문에.

슈발 블랑이 너무 아까워서 그렇지, 사실 햄버거와 레드 와인의 궁합은 예상보다 훨씬 근사하다. 나 역시 시도할 때마다 느낌이 좋았으니, 이 조합에 대해 기본적인 신뢰가 있다. 음식과 술은 대체로 출신지가 같을수록 잘 어울려서, 예컨대 피자와 이탈리아 키안티 와인의 궁합이 훌륭하며 탕수육에는 연태고량주가 제격이다. 그래서 그런지 특히 미국 레드 와인과 햄버거의 조합은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훌륭하다.

일단 미국 와인 특유의 은은한 잔당감이 햄버거 소스의 달짝지근한 맛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레드 와인에 풍부하게 들어 있는 타닌과 두툼한 소고기 패티의 만남은 상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인다. 공복에 이런 장면을 떠올리면 손가락은 이미 배달 앱을 켜고 햄버거집을 검색하게 된다. 일련의 과정은 척수반사적 본능으로 진행되어, 결제를 마친 뒤에야 비로소 상황 인지가 가능하다.

마침 셀러 안에 이마트 트레이더스 부천점에서 2만원대 중반으로 구매한 마리에타 아르메 카베르네 소비뇽이 있어 다행이다. 개인적으로 이 가격대 가성비 최강이라고 생각하는 미국 와인이다. 어느새 도착한 맥도날드 1955 버거를 한입 베어 물고 저작 운동에 들어간다. 크게 인상적일 것은 없지만 기본에 충실한 맛이다. 적당한 타이밍에 와인을 털어 넣는다. 도수가 14.7%인데도 알코올 향이 튀지 않고 술술 넘어가네. 연필심 향과 흙 향이 감도는 매끄러운 타닌이 소고기 패티의 느끼함을 개운하게 씻어준다. 와인이 이 정도 기량이면 다음에는 육즙 터지는 쉐이크쉑 수제 버거와 합을 맞춰보고 싶다.

그나저나 영화 막바지에 마일스는 퇴짜 맞은 자신의 원고를 읽고 감동을 받은 마야로부터 화해의 전화 메시지를 받는다. 나도 마일스처럼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원고를 출판사 수십군데로부터 거절당했는데, 단 한곳을 만족시켜 빛을 보게 되었다. 역시 글도 와인도 구체적인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관건이다. 그 한 사람이 마일스에게는 마야였고, 나에게는 수오서재 편집자였을 뿐. 이 글 또한 와인이 나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쓰인 것 아니겠는가.

임승수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저자 reltih@nate.com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빈티지 오디오 ‘전설의 조합’…나를 위해 질렀다 [ESC] 1.

빈티지 오디오 ‘전설의 조합’…나를 위해 질렀다 [ESC]

구독자 4500명, 월 15만원 수익…적자? 그냥 하고 싶으니까 [ESC] 2.

구독자 4500명, 월 15만원 수익…적자? 그냥 하고 싶으니까 [ESC]

‘갑자기 제주’에서 배 타고 또 섬으로…여행 속 여행의 재미 [ESC] 3.

‘갑자기 제주’에서 배 타고 또 섬으로…여행 속 여행의 재미 [ESC]

가방에 대롱대롱 내가 만든 인형…“내 새끼 같아” [ESC] 4.

가방에 대롱대롱 내가 만든 인형…“내 새끼 같아” [ESC]

숙성기간 짧아도 이토록 깊은 향이… [ESC] 5.

숙성기간 짧아도 이토록 깊은 향이… [ESC]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