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신애의 이달의 식재료] 무화과
한여름 남쪽 지방의 한적한 국도변을 달리다 보면 드문드문 팻말들이 눈에 들어온다. ‘무화과 만원’. 가서 보면 작은 빨간색 바구니에 무화과 열개 정도가 담겨 있다. 세상 탐스럽게 미끈하기도 하다. 한바구니 사서 쪼개보니 속이 연분홍색이다. 입에 넣어보면 약간 맹맹하면서도 달다. 보통 7~8월이면 무화과가 나오기 시작하고 몇번 사 먹다 9월쯤 되면 벌써 관심이 시들해진다. 10월은 돼야 진득한 단맛의 무화과가 쏟아져 나오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손사래를 친다. “이제 무화과는 질렸어. 다른 과일 없어?”
하지만 진짜 무화과의 계절은 지금부터다. 세상이 좋아져서 제철 음식 개념이 사라졌다지만 사시사철 재배가 불가능한 것들도 아직 남아 있는데다 진짜 ‘철’을 맞은 과일의 맛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다. 진하다. 진짜다. 다시없을 그 맛이 바로 10월 무화과다.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무화과는 크게 세종류다. 7월부터 쏟아져 나오는 조생종인 도핀, 청무화과로 알려진 중생종 바나네, 그리고 가장 늦게 10월부터 맛볼 수 있는 만생종 재래무화과 봉래시가 그것이다. 영암이나 제주 등지에선 무화과나무를 심으면 해충이 없어진다고 해서 집집마다 몇그루씩 흔하게 심어 키우던 작물이다. 이국스러운 외모 덕에 수입 과일처럼 느껴지지만 무화과에 대한 국내 기록은 16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에서 들여온 과일이긴 하지만 토착화된 역사는 꽤 길다.
무화과는 그냥 먹는 게 제일 맛있다. 나는 무화과를 4~6등분 해 소금, 후추와 올리브오일을 뿌려 먹는다. 유제품을 좋아한다면 마스카르포네 치즈나 크림 치즈 등을 올려 먹어보자. 천상의 와인 안주가 된다. 돼지고기와 무화과는 맛 궁합이 잘 맞아서 삶은 삼겹살이나 목살 수육에 새우젓과 무화과 잼을 같이 곁들이면 새콤하면서도 농익은 단맛이 돼지고기의 묵직함을 살짝 들어 올려준다.
터지거나 오래된 무화과가 있다면 집에 마시다 남은 와인에 설탕, 레몬, 소금을 살짝 넣고 끓여서 무화과 와인 졸임을 만든 뒤 아이스크림 위에 뿌려 먹는다. 이 무화과 와인 졸임을 냉동실에 가득 채워 넣는 게 매년 돌아오는 10월의 임무다. 녹진한 10월 무화과의 맛을 어떻게든 더 오래 즐기고 싶은 마음. 계절의 순리에 맞서는 당랑거철의 욕심이 작은 무화과 열매에 담긴다.
홍신애(요리연구가)
무화과.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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