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한식을 가미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오픈했을 무렵 새로운 레시피가 필요했다. 당시 명란젓을 생크림에 끓여 내는 명란 크림 파스타가 대유행이었는데, 개인적으로 크림 파스타를 좋아하지 않아서 명란젓을 기름에 볶아 만드는 명란 오일 파스타를 선보였다. 올리브오일을 뜨겁게 달구고 대파를 먼저 볶아 파기름을 낸 후 껍질을 벗긴 명란젓을 듬뿍 넣어 볶아낸 명란 오일 파스타. 나름 야심 차게 개발한 메뉴였으나 6개월 동안 열 접시도 채 팔지 못한 참패의 기억이 있다. 그러다 오일 파스타가 유행하고 명란 오일 파스타도 차츰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가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그니처 메뉴로 자리 잡았다.
명란은 명태의 알이라는 뜻이지만 일반적으로 명란이라고 하면 소금에 절인 저장식품 ‘명란젓’으로 다들 알아듣는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간장이나 참기름, 소금 등을 사용해 여러 생선의 알을 저장식으로 만들어 먹었지만 명란처럼 대중적이고 사랑받는 알은 드문 것 같다. 명란젓은 양념도 화려하다. 마늘, 고춧가루, ‘마법의 흰 가루’ 조미료까지 온갖 옷을 입혀 젓갈을 만들어놓고 또 참기름과 통깨, 다진 마늘, 송송 썬 쪽파까지 올려 먹는다. 이렇게 뭘 많이 얹어도 명란 고유의 캐릭터는 사그라지지 않는 것도 신기하다. 눌리고 꺾여도 굴하지 않는 한민족의 기개를 닮았다고나 할까.
명란의 고향은 부산으로 알려져 있다. 명란은 원래 명태가 많이 잡히던 함경도에서 주로 먹던 음식이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남쪽에 자리 잡은 실향민들이 부산의 초량 일대에서 다시 만들어 발전시키고 이 문화를 일본이 가져갔다고 전해진다. 부산에서 본격적으로 출발한 음식으로서 명란의 역사는 사실 일본에서 ‘멘타이코’라는 이름으로 더 꽃을 피웠다. 일본의 명란 요리는 정말 다양하다. 명란을 구워 먹거나 녹차에 말아 먹거나 또 명란을 넣은 달걀말이, 명란을 얹어 구운 빵, 명란 마요네즈, 명란 버터 등등…. 상상도 못 해본 일본의 명란 요리는 부지런히 우리에게 역수입되는 형편이다. 명란의 종주국이 우리나라라는 게 무색할 정도다. 이런 주객전도는 결국 한 가지 음식에 대한 꾸준한 사랑과 고집, 세월과 노력의 결과이니 누굴 탓할 일도 아니다.
우리는 대부분 가정에서 명란젓을 잘라 참기름, 통깨를 솔솔 뿌려 반찬으로 먹거나 쪄서 먹는다. 일본의 영향으로 명란을 넣은 달걀찜이나 달걀말이도 유행하고 있고 명란을 통으로 구워 술안주로 먹기도 한다. 명란은 어찌 요리해도 맛있지만 한 가지 명심할 사항이 있다. 반드시 껍질과 속살을 분리하는 것이다. 다소 질기고 퍽퍽한 얇은 막(껍질)을 제거하면 너무나 고급스러운 보들보들한 식감의 명란 요리를 만들 수 있다. 명란 껍질은 두부를 넣고 고춧가루 찌개를 끓여보자. 익은 명란 껍질의 살캉거리고 씹히는 느낌마저 감칠맛으로 승화한다. 명란의 부드러운 속살은 참기름과 다진 마늘, 통깨를 넣고 살살 비벼 뜨거운 밥 위에 쓱싹 문질러 먹거나 달걀찜 가운데에 한 숟가락을 넣고 조리한다. 명란 요리를 할 때 또 잊지 말아야 할 게 오버쿡 금지다. 너무 오래 익히면 퍽퍽한 느낌에 물을 계속 들이켜게 된다. 반면 슬쩍 덜 익힌 명란은 보드랍고 입에 착 붙는다. 명란은 요리할 때 항상 마지막 순서에 넣는다고 생각하면 쉽다.
명태는 추운 바다에 사는 생선이고 우리나라 근해에서도 겨울에 주로 잡힌다. 당연히 명란젓도 겨울에 많이 만들어 먹던 음식이다. 올겨울엔 흔한 밥반찬으로만 생각했던 명란을 좀 더 음미하며 아껴 먹어보는 건 어떨까.
글·사진 홍신애 요리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