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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여름 방학 뒤 만난 텃밭, 더 건강해졌네

등록 2021-10-08 05:00수정 2021-10-08 09:57

신소윤의 텃밭 일기
뙤약볕 노동·모기 잠시 안녕
가을 농사로 배추·무 등 심어
수확·김장, 성공할 수 있을까
사진 신소윤 기자
사진 신소윤 기자

하늘은 푸르고 배춧잎도 푸른 계절이다. 다시 농사짓기 좋은 때가 돌아왔다. 가을 시즌에 앞서 우리는 한 달간 ‘오프 시즌’을 보냈다. 내가 분양받은 3평 텃밭은 8월 한 달 여름 방학을 가지고, 밭을 다 갈아엎은 뒤 가을 농사를 재개한다. 수확하지 못한 농작물들을 두고 밭을 갈아엎는 게 아쉬웠지만, 습하고 더운 계절의 밭은 초보 농부에게 여러 애로 사항이 있었다. 8월 중순이 되자 먼저 방학을 시작한 밭들이 속출했다. 여름 수확물이 주는 즐거움과 뙤약볕 아래 노동이 주는 고통을 저울질했을 때, 후자가 더 크다는 계산을 한 듯했다. 잡초들은 어떻게 알고 주인이 무심한 밭을 골라 세를 넓혀갔다. 우리 밭은 입구에서 가장 먼 구석에 있었는데, 어른 허리까지 자란 잡초를 헤치고 가는 것 자체가 곤혹스러울 때도 있었다.

텃밭 사정이야 어떻든 토마토, 가지, 고추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글었다. ‘우리가 농사 기술이 없지 끈기가 없냐’며 방학 직전까지 밭을 찾던 우리는 어느 저녁, 이만 방학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필이면 안개도 자욱하던 그날, 길게 늘어지던 여름 해가 뚝 떨어지더니 이내 컴컴해졌다. 풀벌레 소리가 귀를 찌르고, 모기도 기승을 부리며 팔다리를 찌르기 시작했다. 악악,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니 공포영화가 따로 없었다.

뜨거운 햇볕과 습한 공기의 기억을 마지막으로 2021년 봄여름 시즌 텃밭 생활을 마친 뒤 만난 가을의 텃밭은 그래서 더 청량했다. 새파란 하늘, 보송한 흙, 공기는 바삭거렸고 텃밭에서 나눠준 배추와 무 모종은 여리고 보드라웠다. 완연한 새 시즌의 시작이다.

가을에도 우리는 다품종 소량생산을 목표로 했다. 배추, 무, 갓, 알타리무, 콜라비, 로즈메리, 셀러리 등을 심었다. 모종 가게마다 한가득 존재감을 뽐내고 있던 국화도 한 다발 사다가 텃밭 한쪽에 심었다. 농사에 소질은 없지만 낭만은 잃지 않는 초보 농부라고 자평했는데, 국화는 의외의 기능을 발휘했다. 500번대 이상 번호가 매겨진 빼곡한 텃밭에서 한 다발 국화는 금세 우리 자리를 알아볼 수 있게 노랗게 반짝였다.

봄여름에 기른 작물에서 주로 열매를 얻었다면, 가을 농사로 심은 작물들은 대부분 잎채소다. 텃밭 사장님은 모종을 나눠주며 “우리 배추 모종이 맛있으니 나중에 김장 맛있게 잘하라”는 말을 했다. 김장이라니. 내게 김치는 사거나 얻어먹는 음식이 아니었던가. 엉겁결에 24개의 배추 모종과 30개의 무 모종을 받아들고 난감하기도, 기대되기도 하는 가을 농사에 돌입했다.

가을 햇볕과 바람엔 무슨 영양소라도 들어 있는 걸까. 우리는 여전히 일주일에 겨우 한번 텃밭을 들렀지만, 배추와 무는 무서운 속도로 자랐다. 어른 얼굴보다 커진 배춧잎, 반질거리며 얼굴을 드러낸 무를 보고 있자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배추와 무가 폭풍 성장하는 덕에 잡초는 봄보다 위력이 약해졌다. 배춧잎 그늘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잡초는 오히려 안쓰럽기까지 했다.

식물도 잘 자라려면 거리두기가 필요했다. 어른 얼굴보다 더 크게 잎을 키운 배추를 적당히 솎아냈다. 솎아낸 배추는 집에 와 깨끗이 씻고 삶아서 우거지를 만들었다. 한 끼 된장에 무쳐 먹고, 한 끼 된장국을 끓여 먹으니 속에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여름의 작물들이 아삭거리며 통통 튀는 맛이 있었다면 가을 작물을 이런 맛이구나.

우리의 농사 소식을 전해 들은 친구의 이웃 할아버지가 서리가 내릴 즈음에 배추를 묶어주라고 조언했다. 알아들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다 우리는 “잠깐, 근데 서리는 언제 내리는 거지?” 멈칫했지만 또 계절이, 바람이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 사계절 중 가을은 유독 후다닥 지나가는 느낌인데, 가을 농사 또한 그런 느낌이다. 이러다 눈 깜짝할 새 수확과 김장이라는 큰 산이 우리 앞에 닥치지 않을까. 그 대장정을 우리는 무사히 완료할 수 있을까. 책상머리 앞에서 한가한 농부의 가을이, 이 순간에도 지나고 있다.

글·사진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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