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길었다. 다른 계절이 좀 느닷없이 끝나버린다면 언제나 겨울은 좀 꼬리가 긴 듯했다. 농부가 되고선 그 느낌이 좀 더 강렬해졌다. 아마도 목이 빠져라 봄을 기다리는 초보 도시 농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루한 마음에 작은 화분에 씨앗을 심었다. 지난봄 밭에 뿌린 뒤 냉장고 한 귀퉁이에 잘 넣어둔 루콜라 씨앗을 꺼냈다. 신문지를 깔고 화분 안에 소복하게 흙을 부었다. 오랜만에 맡는 흙냄새가 좋았다. 촉촉하고 차가운 흙이 손에 닿는 느낌도 좋았다. 담아 올린 흙을 토닥토닥 재운 뒤, 씨앗을 심었다. 지름 10㎝가량 아주 작은 화분이었지만, 여기서 봄을 먼저 만난다면 좋겠다 싶었다.
루콜라 씨앗은 기대 이상으로 빠르게 잎을 틔웠다. 씨앗을 심은 지 3일째쯤, 하트 모양의 작은 이파리가 흙을 뚫고 올라왔다. 함께 씨앗을 심은 우리 집 꼬마와 박수를 쳤다. 그리고 며칠 뒤, 루콜라들은 다시 기대 밖의 모습을 보였다. 정신없이 웃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집 안에서 가장 햇빛이 잘 드는 곳에 화분을 뒀지만, 두겹의 유리창을 뚫고 힘이 꺾여 들어오는 햇살은 식물을 기르기에 영 부족한가 보다. 지난봄, 여름 텃밭의 기세등등했던 햇살을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잠시만 서 있어도 목 뒷덜미를 지지는 듯한 햇살 정도는 돼야 식물이 ‘나 광합성 좀 한다’ 하나 보다. 거기에 춥다고 문을 꼭꼭 닫아둬 바람 한점 느낄 수 없는 실내 환경을 식물이 좋아할 리가 없다. 웃자라다 어쩔 도리인지 이제는 거의 성장을 멈춰버린 루콜라에 오늘도 물을 주며 봄을 기다린다.
프로 농부들은 겨울 농한기에 무엇을 할까. 들어보니 농기계 정비를 하고, 가을의 수확물을 저장식품으로 만들어 내다 팔기도 하고, 봄에 밭에 쓸 부엽토를 산에 가서 모아 오기도 하나 보다. 하지만 해마다 밭을 계약해야 하는 도시 농부인 내가 할 일은 오로지 시에서 운영하는 밭의 당첨 여부를 기다리는 것뿐. 떨어지면 사설로 운영되는 밭 어디와 계약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뿐이다.
지난해 3평 텃밭을 나눠 썼던 친구와 올해 농사 계획을 세웠다. 올봄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친구와 각각 서로의 집에서 가까운 밭을 구해보기로 한 것. 지난해 늦봄, 급하게 구해 나눠 쓴 밭은 땅이 좋아 초보 농부인 우리가 대부분의 작물을 실패 없이 키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몇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주말 막히는 길을 피해 갈 코스가 없는 곳에 있었고, 옥수수, 고구마 등 구황작물을 기를 수 없었다. 옥수수는 밭 간격이 좁은 터라 다른 밭에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이유로, 고구마는 8월 한달 텃밭을 쉬고 전체를 한번 갈아엎는 일정 때문에 키울 수가 없었다.
탄수화물의 달큼하고 구수한 맛을 사랑하는, 구황작물 구애자들인지라 올해는 다른 밭에서 옥수수, 고구마 따위를 양껏 심어보기로 했다. 더불어 시기에 맞춰 수확물들을 차근차근 걷어 먹을 수 있도록, 올해도 다품종 소량생산을 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그래 봐야 초보 레벨을 벗어나지 못하는, 손바닥만 한 밭을 운영하겠지만 지난해에 비하면 1인당 밭 규모를 두배 이상 키우는 셈이다.
그래서 올해는 따로 또 같이 농사를 지어보기로 했다. 각자의 밭에 원정을 가 밭일을 지원하고, 서로 다른 작물을 키워 바꿔 먹기로 한 것이다. 아무래도 친구에게 나눠주려 하다 보면 좀 더 공들여 기르게 되지 않을까. 여성 농민들이 기른 토종 작물 구독 시스템인 ‘언니네 텃밭’ 꾸러미처럼 때맞춰 기른 작물과 수확물로 만든 간식이나 반찬을 살뜰하게 구성해서 서로에게, 그리고 다른 친구들에게 보내봐도 재밌겠다며 서로 한해 농사를 응원했다.
이 글을 마감하던 중 마침 이달 초 신청한 시민농장에 당첨됐다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이 소식만으로도 폭신한 흙을 밟는 기분, 햇빛 냄새, 바람 냄새를 만끽할 생각에 조금 설렌다. 이렇게 농사에 진심이 될 줄은 몰랐지만, 그리하여 초보 농부에게도 드디어 봄이 오는 걸까! <끝>
*그동안 ‘신소윤의 텃밭 일기’를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