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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따뜻한 무관심’ 속 잘 자란 초록이들 고마워

등록 2022-01-01 11:41수정 2022-01-01 12:10

신소윤의 텃밭읽기
기자와 농부, 본캐와 부캐 사이
자연의 마감시간에 쫓기다가
갑작스레 한가한 농한기 어색
가을 밭에 나가면 잘 자란 채소들이 방실방실 웃으며 우리를 맞는 듯했다. 보라색 뿌리가 화사한 콜라비. 신소윤 기자
가을 밭에 나가면 잘 자란 채소들이 방실방실 웃으며 우리를 맞는 듯했다. 보라색 뿌리가 화사한 콜라비. 신소윤 기자

어쩐지 마음이 느긋해졌다. 주말농장 누리집의 공지사항이 ‘가을 수확 작물 안내’에서 멈췄다. 땅도 농부도 쉬는 긴 겨울방학의 시작. 3평, 손바닥만한 텃밭이지만 생애 처음 누리는 농한기다.

기자란 무엇인가. 사전적 뜻만 보면 ‘신문, 잡지, 방송 따위에 실을 기사를 취재하여 쓰거나 편집하는 사람’이다. 다른 훌륭한 기자는 모르겠지만, 나 같은 기자를 말할 땐 저기 어딘가에 ‘마감에 쫓겨’라는 말을 집어넣어야 비로소 그 뜻이 완성된다.

농사를 하면서도 때때로 ‘본캐’(본래 캐릭터)일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돌아서면 자라 있는 작물과 무성해진 잡초는 마치 기사 하나 마감하고 한숨 돌릴라치면 마주하는 산적한 일 더미와 같았다. 그런데 마감 노동이란 꽤 중독적이라서 머리 쥐어뜯으면서 쓴 기사 한 꼭지 털고 마시는 맥주란 얼마나 시원하고 달콤한가. 작열하는 태양에 정수리가 타오르는 걸 느끼며 잡초를 쥐어뜯은 뒤, 말끔해진 밭을 봤을 때도 비슷한 쾌감을 느꼈던 것 같다. 지난해 난생처음 농사를 하면서도 자꾸만 기시감이 들었던 건 아마도 자연이 재촉하는 마감 시간에 맞춰 무언가를 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늘 쫓기며 사는 본캐 때문일까. 농사를 쉬고 있는 이 순간, 한가한 마음이 들면서도 무언가 다음 일을 도모하고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진짜 농부들은 농한기에도 바쁘다는데, 알량한 도시농부인 나는 주말농장 다음 계약을 기다리는 일밖에 없으니 이제 어쩐다. 베란다 텃밭을 열어볼까, 가정용 실내 식물 재배기를 들여볼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그냥 접어뒀다.

통통하게 자란 무. 신소윤 기자
통통하게 자란 무. 신소윤 기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봄~가을 농사로 저장해놓은 것들을 긴 겨울 조금씩 꺼내 먹으며 지난 농사를 리뷰해보는 것. 지난해의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따져보며 올해 농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보자.

지난해 농사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3평 텃밭을 함께 경작한 친구 케이(K)와 나의 한 줄 평은 “따뜻한 무관심”이다. 게으른 농부의 작태를 지나치게 포장한 것 아닌가 싶긴 하지만, 과도한 관심은 때때로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걸 우리는 여러 방면에서 경험하지 않았나. 코로나19 이후 식물 기르기에 심취한 케이는 한두개로 시작한 화분을 1년 사이에 수십개로 늘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식물을 하나만 기르는 것보다 여럿 기르는 게 더 잘 큰다던데 왜인지 알겠어. 화분이 몇개 없을 때는 만날 쳐다보면서 언제 크나, 얼마나 컸나, 안달복달하면서 물도 자주 주고, 그러다 뿌리가 썩어서 결국 망치게 되거든. 그런데 화분이 많아지면 돌봐야 할 게 많아서 과욕을 부릴 새가 없어.” 식물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물을 듬뿍 주는 것보다 때때로 물 주는 걸 잊고 흙을 말리는 게 오히려 식물에게 도움이 되더란 뜻이다.

더 확장해 아이를 기를 때도, 회사 생활로, 사적으로 엮이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한해 농사를 되돌아보며, 지난 2년 코로나19로 꼭 만날 사람만 만나며 지낸 협소한 관계 속에서 그들에게 애정이랍시고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않았는지, 지나치게 많은 걸 요구하지 않았는지 살펴본다.

마음의 양식만 얻은 건 아니다. 좀 더 본질적인 양식들이 아직 냉장고에 쌓여 있다. 모종부터 김치까지 직행한 생애 첫 김장은 든든했고, 튼실한 셀러리로 만든 피클은 냉동 피자도 고급스럽게 만드는 빛나는 조연이다. 여름에 만들어 작은 통에 소분해 얼려둔 쑥갓 페스토는 재택근무 하다 급할 때 파스타에 비벼 먹고, 빵에 발라 먹곤 한다. 라면보다 빠르고, 배달 음식보다는 덜 처량하다.

따져보니 밭에선 얻은 것들뿐이다. 철없는 농부에겐 도대체 마이너스란 없다. 봄이 오기까지 한참 더 남았지만, 어서 빨리 흙을 만지고 싶다. 여리고 하찮은 새싹을 튼실하게 키워 올리며 마치 그게 다 내 덕인 양 의기양양해지고 싶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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