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타기가 힘들다. 다름 아닌 지하철 광고 때문이다. 광고는 육식 세상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1위는 배달 음식의 왕좌에 오른 치킨이다. 닭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광고 모델이 있을까? 저녁 시간만 되면 텔레비전에서는 어김없이 연예인이 나와 닭고기를 뜯는다.
음식 광고는 비주얼이 중요하고, 사람들은 화려한 색채, 자극적인 소리, 움직이는 단백질을 좋아한다. 출렁거리는 소스에 담기고 형형색색의 시즈닝이 뿌려지는 요리. 쭈~욱 늘어나는 치즈. 지글지글 튀겨지는 음식. 그래서 비주얼의 강점이 드러나지 않아 귀에 꽂히는 시엠송을 따로 만들어야 하는 라디오 광고가 차라리 청정지역이다.
지하철은 다르다. 대형 간판이 곳곳에 자리 잡은 지하철은 비주얼 천국이다. 먹음직스러운 광고가 잘 먹힌다. 티브이와 같이 지하철에서도 튀겨진 닭이 주 모델이다. 치킨 광고의 공식에는 변함이 없어도 그 모습은 항상 진화한다. 새로운 맛을 찾는 소비자를 만족하게 하기 위해 예전에는 파에 절이고 간장에 담갔던 닭을 이제는 고추장에 담근다. 된장에 담글 날이 머지않았다.
전세계 맥도널드 점포 수보다 더 많은 수의 치킨집이 있다는 한국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초기에는 수요가 공급을 불렀을지 몰라도 이제는 과잉공급이 수요를 부르는 시대이다. 닭은 새로운 방식으로 요리되어 끊임없이 등장하고, 끊임없는 소비를 유도한다. 오죽하면 닭을 의미하는 영어인 치킨이 한국에서는 닭튀김을 의미하는 단어로 자리 잡았을까. 이 치킨이라는 단어는 ‘치느님’, ‘치맥’ 등 끊임없이 신조어로 재생산되며, 단어와 형태가 본질에서 멀어질수록 소비자 또한 닭에서 멀어진다. 소비자가 광고를 통해 접하고 배달 앱을 통해 주문하는 알록달록한 양념에 버무린 ‘치킨’은 더 이상 닭이라는 생명체가 아니다.
이렇게까지 닭튀김이 문화 속에 깊게 자리 잡은 현실에는 브랜드 마케팅과 광고가 한몫했을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을 기억한다. “정말 좋은 상품은 홍보가 따로 필요 없다. 그러니 광고를 많이 하는 제품을 조심해야 한다.” 여기에도 그 말이 완벽히 적용되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애호박이나 양배추를 광고로 접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와 반대로 건강에는 해롭지만 자극적인 맛, 형태, 소리로 유혹하는 라면이나 육고기 광고는 끊이질 않는다.
비건이 되기 전에는 광고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생판 모르는 아이돌의 생일을 축하하는 지하철 광고를 제외하면 광고를 즐겨 보는 편이었다. 이제는 다르다. 지하철을 타도 광고가 눈에 걸리고, 버스를 타도 스크린의 내용에 신경이 쓰인다. 참 신기하다. 이만큼 내 생활 구석구석에 자리 잡으며 나의 소비 생활에 영향을 미쳤는데도 왜 전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까?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일까.
나는 종종 친구들에게 비거니즘을 ‘매트릭스’의 빨간 약과도 같다고 이야기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는 매트릭스에서 깨어나서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빨간 약을 선택한다. 하지만 진실의 사막은 불편하고 불쾌하다. 나는 비건이 돼서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혜택을 누리면서 그것을 당연시해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제 광고를 보면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왜 나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소비자로서 생활 속 수많은 광고에 노출되어야 할까? 하루에도 수십번 지나치게 되는 대중교통 광고를, 기후위기와 같은 사회적인 이슈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플랫폼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을까? 비거니즘의 빨간 약은 사람을 체제 밖으로 인도하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관점을 제시한다.
비거니즘은 피할 수 없는 물결이다. 문명의 발달로 인해 우리의 윤리관이 확장될수록,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가 가속될수록, 코로나19와 같은 인수공통 감염병으로 인한 우려가 커질수록 채식에 대한 목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번달부터 독일 베를린의 일부 대학교 교내 식당은 채식 위주 식단을 도입하기로 했다. 이제는 서울 시내버스 외부광고에서도 비건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보인다. 내일 당장 닭은 된장에 담기게 될지 몰라도, 길게 보면 우리의 가치관, 그리고 그것을 대변하고 움직이는 광고의 지형이 바뀌게 될 것이다.
홍성환(비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