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평소에 그 점을 곧잘 잊는다. 사실 잊으니까 살 수 있고, 살기 위해서라도 잊어야 하는 일이다. 어쨌든 현재를 밀고 나가는 힘도 바로 그 망각에 있을 테니까.
식물 세계에 입문할 즈음 ‘세컨드 스텝’이라는 말을 배웠다. 유튜브 영상을 통해서였다. 한 베고니아 전문가가 외줄기 베고니아를 가리키며 이렇게 줄기가 하나면 불안하고 ‘세컨드 스텝’이 나와줘야 안심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가 말한 세컨드 스텝은 식물이 순 하나를 올린 뒤 그 옆으로 또 다른 순을 내는 것을 말했다. 그렇게 순 하나가 늘어난다는 건 식물이 잘 자라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고, 혹시 잘못해서 줄기가 상하더라도 다른 하나가 남아 있으니 당연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자, 보이시죠? 세컨드 스텝이 있어야 문제가 생기더라도 걱정이 없다, 이 말씀입니다!”
우리 집에서 연이어 세컨드 스텝을 내고 있는 식물은 필레아 페페다. 필레아 페페는 중국에서는 돈나무라고 부를 정도로 크고 둥근 잎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키우기 쉬워서 초보자들에게도 한없는 기쁨을 주는데 우리 집에서도 새순을 펑펑 터뜨려가며 잘 자라고 있다. 자구를 떼다가 화분을 세개나 늘렸을 정도다. 그렇게 세컨드 스텝이 있다는 건 다음이 보장되는 것, 내일을 살아갈 힘이 비축되어 있다는 것. 미래에 대해 생각이 많아질 때면 나는 영상 속 그 베고니아 전문가를 떠올렸다.
오랫동안 함께했던 반려견이 세상을 떠나고 가장 변한 사람은 엄마다. 며칠 전에는 전화를 걸어와 이십여년 전 들었던 내 보험의 보장 내역을 확인하러 보험사에 같이 가자고 했다. 지금 엄마 보험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는데 내 것도 해야겠다는 얘기였다. 나는 갑자기 엄마가 왜 보험 이야기를 하나, 그리고 나는 지금 당장 보험 청구할 일도 없는데 거기까지 가야 하나 싶어 다음에 하자고 미뤘는데 그 다음주엔가 엄마는 정말 보험사를 방문해 보험 약관에 대해 알아보고 왔다.
“이 회사 보험은 암이 다 되고, 여기 회사는 부인과 질환까지 다 되고, 이건 나중에 갱신하면 100살까지 보장이고.”
엄마는 약관들을 보며 되풀이해 설명하다가 내가 귀담아듣지 않자 나중에 자기가 없으면 어쩌느냐며 걱정을 했다. 보험금 청구 같은 일들을 잘 챙기지 못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굳이 지금 이렇게 암, 골절, 사망 같은 단어들을 늘어놓으며 우리가 대화해야 할까. 좀 피곤해졌을 때 엄마가 말했다.
“나중에 나 죽으면 내가 든 이 보험회사에서는 위로금도 나와. 잘 알아둬.”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평소에 그 점을 곧잘 잊는다. 사실 잊으니까 살 수 있고, 살기 위해서라도 잊어야 하는 일이다. 어쨌든 현재를 밀고 나가는 힘도 바로 그 망각에 있을 테니까. 하지만 반려견이 떠나고 나니 누구에게나 예정되어 있는 그 ‘부재’라는 숙명이 아주 가까운 오늘의 문제로 다가왔다. 엄마는 반려견이 떠나간 것처럼 그다음에는 당신이 내 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면 남겨진 딸은 어떻게 될 것인가, 구체적으로는 얘가 몸 아플 때 보험금이라도 제대로 타 먹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엄마가 떠올리는 자신의 세컨드 스텝이 허방 속으로 한발 내밀듯 막막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염려하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만큼 살아보지도 못한 내가 마치 내일의 부재가 없을 것처럼 낙관하라는 말을 늘어놓는 일 또한 사실상의 무례였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엄마의 내일을 지지해주어야 할까, 그것이 가능할까. 나는 어쨌든 엄마와 자주 만나고 연락 횟수를 늘렸다.
며칠 전에는 엄마를 고속터미널역에서 만났다. 대구에 사시는 삼촌이 서울 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오는 날이어서 엄마가 외출한 것이었다. 삼촌은 지금 3차신경통으로 인한 통증을 앓고 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병의 치료 덕분에 남매는 자주 만나게 되었다. 평소에는 3∼4년이 돼야 한번 만날까 말까 할 정도였다.
처음 치료를 하러 온 동생을 만났을 때 눈이 빨개지도록 울었던 엄마는 이제 조금은 담담하게 병원을 가고 함께 밥을 먹고 또 대구로 동생을 떠나보낸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순간들에 어떤 감정들이 일어났다 사라지는지, 완치가 어렵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매번 확인하고 내려가는 막냇동생을 바라보는 누나의 마음 같은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한없이 슬프고 아프기만 한 좌절로 연속되어 있는지, 아니면 엄마가 살아온 세월 동안 반복된 그 무수한 내일들 덕분에 그 사이사이 실버라이닝(silverlining) 같은 어떤 희망과 의지가 빛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그런 엄마의 나날들을 지켜보며 나 역시 맞게 될 몇십년 후의 일상에 대해 어렴풋이 배워갈 뿐이다.
엄마와 나는 역에서 만나 꽃시장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도매상가니까 얼마나 다양한 꽃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을까 우리는 기대에 부풀었지만, 애석하게도 생화시장은 정오까지만 운영해 모두 닫혀 있었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층 전체에 꽃향기가 진하게 났고, 그렇게 향기가 또렷한데도 우리가 구입 가능한 건 조화들뿐이었다. 나는 사려면 생화를 사야지 조화는 안 된다고 아쉬워하다가 매대 앞에 매달려 있는 화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미, 백합, 델피니움, 들꽃, 라넌큘러스와 데이지…. 엄마와 나는 앞에 서서 한동안 홀린 듯이 그 마술처럼 예쁜 꽃들을 올려다보았다.
“화관 좀 더 작은 사이즈는 없나요?” 이윽고 내가 가게 사장에게 물었다.
“더 작은 거 뭐에 쓰시게?”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조금 더 작아야 한다고만 이야기했다. 그러자 사장은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작은 걸 찾느냐고 또다시 물었고 내가 말을 않자 엄마가 “우리 죽은 강아지 유골함에 씌워줄 거예요” 하고 대답했다. 말을 고르거나 덧대거나 당연히 망설이지 않고, 내가 이 만발한 조화들 속에서 차마 꺼내지 못한 어떤 불행 혹은 상태를 정확히 설명했다. 그 슬픔의 무게를 덜어줄 화관의 판매를 요구하면서.
내가 아는 한 식물들의 세컨드 스텝은 아주 적절한 거리 속에 유지된다. 순 하나가 올라왔다고 원줄기가 도태되지 않고, 원줄기가 새로 나온 순을 경계하여 고사시키는 일도 없다. 그렇게 조용히 각자의 다음 스텝에만 충실한 식물들은 때론 모든 생명의 궁극적 방향을 알고 있는 듯 느껴지곤 한다. 그러니까 그다음에 대해 숙고하고 결정하는 것은 그 개체 스스로의 몫이자 ‘권리’라는 것.
나는 이제 내일부터 엄마에 대한 걱정은 조금씩 덜기로 했다. 김금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