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배우는 성인이 늘고 있다. 피아노 학원에서 연습 중인 비계공 장형석씨.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장편소설 <밝은 밤>, 소설집 <쇼코의 미소> 등을 쓴 최은영 작가는 올해 봄 한 인터뷰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언젠가는 차이콥스키 4계 중 6월 ‘뱃노래’를 치는 상상을 한다”고 말했다. 피아노는 들고 다닐 수 없으니 어디서 자랑하기도 힘들다. 들어줄 만하게 치려면 지난한 연습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만만찮은 악기에 도전하는 어른들이 늘고 있다. 장형석(51)씨는 47살에 피아노를 시작했다. 안나연(35)씨는 34살에 다시 건반 앞에 앉았다. 이들은 퇴근 후 혼자 피아노를 친다. 왜 칠까? 장형석씨와 안나연씨에게 들어봤다.
장형석씨는 10년 차 비계공이다. 공사 현장에서 다른 작업자들이 높은 곳까지 올라 일할 수 있도록 지지대와 발판 등 임시구조물을 세운다. 위험하고 힘들다. 그도 추락할 뻔한 적이 있다. 아침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고 난 뒤 학원에서 피아노를 친다. 4년6개월째 거의 매일 쳤다. “연습할 곡 멜로디 라인을 흥얼거리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가요. 일상의 탈출구인 셈이죠.” 요즘엔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를 연습 중이다. 악보 상단에 프랑스어로 ‘un peu moins vite’(욍 푀 무앵 비트)라고 쓰여 있다. 인터넷 사전에서 찾아봤다. “약간, 적게, 빨리? 빨리 치라는 거야, 천천히 치라는 거야?” 템포를 잡는 데 애를 먹었다. 터치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의 미세한 차이를 이제 그는 안다. 그래서 더 어렵다.
피아노 치다 욕 나올 때가 있었다고 한다. 뭣도 모르고 도전했다 된통 당한 곡이 있다. 피아노를 시작하고 9개월이 됐을 때 이루마의 ‘리버 플로스 인 유’를 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연습하다 작곡가를 때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이후 이런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악보를 여럿 만났다. 그는 자기 블로그 ‘생초보 피아노 배우기’(
blog.naver.com/scaff-eng)에 이렇게 썼다. “어려운 곡 썼다고 때려야 한다면 쇼팽은 멍석말이를, 리스트는 조리돌림을 당해야 한다.” 슈만한테도 된통 당한 그는 <어린이 정경>을 <어린이 학대곡>이라고 부른다. “좋아하는 곡을 비슷하게나마 소리 낼 수 있다는 게 감동이죠. 기왕 하는 거 잘하고 싶은데 실력이 늘수록 자기만족의 기준도 올라가버려요.”
피아노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배우고 싶었다. 이상한 음악 선생님을 만났다. 음악은 고등학교 입학시험 과목이 아니라 아무도 수업에 관심이 없었다. 듣든지 말든지 선생님은 침을 튀기며 화성을 설명했다. 도대체 뭔데 저렇게 열심인가 궁금해졌다. 수업을 듣고 베토벤 <운명> 테이프를 샀다. 그렇게 클래식에 빠졌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사내자식이 무슨 악기냐’라는 정서가 있던 시대라 피아노를 배우지 못했다. 대학 졸업하던 해에 외환위기가 터졌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한적한 전원주택에서 그랜드피아노를 치는 그런 미래를 꿈꿨어요.” 그런 ‘미래’는 점점 멀어졌다. 2017년 2월28일, 47살이 된 그는 생각했다. “네가 생각하는 여유는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야? 그 여유는 언제 오는 거야? 전원주택에 안 살아도 피아노 배우는 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잖아.” 그는 혼자 선율과 반주를 모두 처리할 수 있는, 독립적인 악기 피아노를 오래 좋아했다. 그날 피아노 학원에 갔다.
그는 군대 시절 헬기래펠을 타는 대신 두시간 얼차려를 받았다. 고소공포증 탓이었다. 비계공이 된 뒤엔 롯데월드타워 꼭대기에도 올라 일해봤다. 그가 만든 비계는 허공에 짓는 집이다. 목공이나 철근 등은 작업의 흔적이 건물에 남지만 비계는 건물이 완성되면 사라진다. “그렇지만 우리 비계공들은 건물의 외관만 봐도 압니다. 저 건물의 어떤 작업을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 비계를 설치하고 해체했겠구나.” 피아니스트는 되지 못할 거라는 걸 그도 안다. 무엇이 되려고 치는 게 아니다. 그는 한곡을 6개월에서 2년에 걸쳐 꾸준히 연습하고 다듬는다. 아무리 연륜이 쌓여도 눈대중으로 대충 하지 않고 일일이 수평계로 재가며 비계를 쌓아 올리는 비계공들이 있다. ‘예술’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는 자기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다시 몰입할 수 있는 새로운 분야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참으로 감사하게 여겨졌다. 미래의 영광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오로지 현실 그 자체의 모습을 바꾸기 위한 순수한 몰입. 그 고통스러운 쾌락에 다시 몸을 내던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느껴진다.”
피아노 연습 중인 안나연씨.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한 기업에서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는 안나연씨는 지하철역을 나와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쇼팽의 녹턴 13번을 듣는다. 스트레스가 많다. 나연씨가 꿈꿨던 일인데 어느새 매일 반복되는 생활이 됐다. “이 곡을 들으면 아름다워서 살아갈 힘이 좀 나요.” 일하다 화가 나면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피아노 학원으로 갔다. 모차르트 소나타 8번 1악장을 쳤다. “모차르트가 어머니 임종 즈음에 작곡한 곡이라 비장해요. 치다 보면 위로를 받아요. 피아노 칠 때는 다른 생각이 안 나요. 악보 보고 안 틀리게 쳐야 하니까.”
나연씨는 초등학교 때 속셈 학원 끝나고 피아노를 치러 다녔다. 피아노 학원은 동네 돌봄교실 같은 구실도 했다. 지겹다는 애들도 많았는데 그는 혼자 쳐도 되는 피아노가 재미있었다. 중학교 올라간 뒤엔 공부 때문에 피아노는 그만둬야 했다. 지난해 3월19일, 그는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코로나 탓에 재택근무가 늘던 때였다. 운동도 그만두고 대학원 수업도 온라인으로 전환됐다. “유튜브를 보는데 조성진 연주 영상이 뜨는 거예요. 피아노는 혼자 치면 되니 코로나 영향을 덜 받을 것도 같았어요.” 그날 학원에 등록했다.
어릴 때처럼 체르니, 하농(아농)부터 칠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쇼팽 왈츠 중에서 쉬운 몇곡을 추천했다. 이후엔 나연씨가 치고 싶은 곡을 뽑아 갔다. “곡 하나를 치는 게 저한테는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거 같았어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제가 뭘 만들어내는 게 좋았어요.” 차이콥스키 사계 중 12월을 칠 때는 속도가 잘 붙지 않아 애가 탔다. 곡의 중반부를 넘어가면 체력이 떨어져 손가락이 풀렸다. “회사 일이었으면 짜증 났겠죠. 그런데 피아노는 제가 못 친다고 누가 뭐라고 하지 않잖아요. 저만 즐거우면 되니까. 더듬더듬 기어가듯 쳤는데 반복할수록 속도가 붙으니 성취감이 들었어요. 내성적이고 끈기 있는 사람들한테 잘 맞는 악기인 거 같아요. 제가 친 걸 녹음해서 들어보거든요. ‘아, 내가 이때 이 부분 때문에 애먹었는데 이렇게 쳤구나’ 하면서 그 시절이 떠올라요.”
안나연(가운데)씨가 피아노 학원 관계자와 대화를 하고 있다.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학원에서 연주회가 열린 날이었다. 두명이 피아노 한대를 함께 쳤다. 다들 피아노와 놀았다. 한 선생님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쇼팽 폴로네즈였어요. 그렇게 가까이서 누군가의 연주를 들은 건 처음이었어요. 공연장에선 연주자와 관객이 명확히 구분되고 거리도 더 멀잖아요. 10분 정도였는데 홀린 듯 들었어요. 그 사람만의 울림이 있었어요.”
그의 버킷리스트 첫번째는 쇼팽 발라드 1번을 치는 것이다. 언젠가 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어려운 곡이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2차세계대전 중 굶주린 유대인 피아니스트가 생사를 걸고 독일군 장교 앞에서 연주했다. “삶의 낭떠러지에서도 예술을 한 거잖아요. 영혼을 담아서. 어떻게 보면 클래식은 쓸모없죠. 뭘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쓸모없고,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해야 삶이 의미 있는 거 같아요.”
그런 ‘쓸모없는 아름다움’을 제 손가락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어른들이 늘고 있다. 나연씨가 다니는 ‘비바피아노’ 권민정 원장은 “유튜브로 피아니스트들 연주를 쉽게 볼 수 있게 되다 보니 20대 학생부터 50대 후반 주부까지 인생 곡 하나쯤은 한번 쳐보고 싶다는 분들이 많다”며 “성인이 된 뒤 피아노를 배울 때는 좋아하는 영화음악 등을 쉽게 편곡한 곡을 쳐보는 식으로 흥미를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성인 피아노 학원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동호회 구실도 하고 있다. 2007년 성인 취미 피아노 체인을 처음 연 ‘위드피아노’는 올해 지점이 49곳으로 늘었다. 서주영 실장은 “주 52시간제가 시작되면서 수강생이 크게 늘었다”며 “워라밸이 중요해지면서 악기에 대한 관심도 커졌는데 피아노는 어릴 때 쳐본 경험이 있는 경우가 많아 선택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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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는 반복 또 반복의 연속이다.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