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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시정잡배 시절 떠오르는 거칠고 드센 맛

등록 2021-10-28 04:59수정 2021-10-28 09:33

임승수의 레드
거친 풍미 칠레 카르메네르 순대곱창볶음과 ‘굿’
순대곱창볶음과 어울리는 거친 풍미, 몬테스 알파 카르메네르. 임승수 제공
순대곱창볶음과 어울리는 거친 풍미, 몬테스 알파 카르메네르. 임승수 제공

대체로 모든 것에는 적절한 ‘때’와 ‘장소’가 있기 마련인데, 음식도 예외가 아니어서 날씨가 쌀쌀해질 ‘때’면 매콤뜨끈한 순대곱창볶음이 그렇게 생각날 수가 없다. 전에는 그때마다 신림동 순대타운이라는 ‘장소’를 일부러 찾아갔다. 건물 전체가 순대집인데, 입구에 들어서면 이 식당 저 식당 동시다발적으로 불러대는 통에 정신이 혼미해져 그냥 가까운 곳에 털썩 주저앉곤 했다. 주둥이에 플라스틱 잔을 뒤집어쓴 콜라 한병이 테이블에 놓이면, 주문받는 분에게 텁텁한 간은 조금만 주시고 순대랑 곱창을 더 챙겨달라고 요청한다.

불판 위에 재료가 벌어지면 양념이 잘 섞이고 재료가 골고루 익도록 이리저리 뒤집어준다. 열전도 현상에 의해 불판의 온기가 순대와 곱창에 충분히 전해지면, 불판의 금속성 온기와는 다른 단백질 가득 품은 동물성 온기가 뿜어져 올라온다. 이쯤 되면 구강에서는 이집트 나일강 범람하듯 침이 범람할 터. 젓가락을 들고 순대부터 집을지 졸깃한 곱창부터 골라 먹을지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깻잎 뒤섞인 당면부터 한 움큼 집는다. 이후의 젓가락질은 무의식의 흐름에 맡기게 되는데, 프랑스 초현실주의에서나 나오던 자동기술법이 순대집 젓가락질에도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어느덧 세월은 흐르고 기술이 극적으로 발전했다. 이제 매콤뜨끈 순대곱창볶음이 격렬하게 떠오르면 5535번 버스를 타지 않고 배달 앱 켜서 손가락만 까딱거린다. 앞서 모든 것에는 적절한 때와 장소가 있다고 했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적어도 장소 문제는 극복한 것이다. 마침 아침 기온이 영하에 근접하니 순대곱창볶음 먹기 딱 좋은 날씨 아닌가.

어울리는 와인을 찾아 이리저리 검색하다가 누군가 ‘카르메네르’를 추천하는 댓글을 발견했다. 유레카! 아내가 ‘시정잡배의 맛’이라고 평한 순대곱창볶음과 맞추려면 와인도 드센 놈이어야 할 텐데, 가성비 와인의 나라 칠레를 대표하는 포도 품종 ‘카르메네르’의 풍미라면 딱이다 싶었다. 카르메네르는 ‘피망 향’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향이 강해서 호불호가 갈리지만, 바로 그 거친 풍미가 순대곱창볶음의 진한 양념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김포 와인아울렛 떼루아에서 2만원대 후반 가격으로 ‘몬테스 알파 카르메네르’를 구입한 후, 신림동 순대타운의 소문난 맛집에 배달 앱으로 주문을 넣었다. 곧 음식이 도착했고, 준비된 젓가락을 한껏 벌려 일부러 순대와 곱창을 한꺼번에 집어 입에 넣었다. 과연, 기대에 부응하는 맛이구나. 충분히 씹힌 음식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쯤 ‘몬테스 알파 카르메네르’를 한 모금 삼켰다. 순간 걷잡을 수 없었던 20대 그 시절이 떠오른다. 신림동 순대타운에서 친구 놈과 마주 앉아 순대곱창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미국에는 갱스터 래퍼가 있냐? 한국에는 내가 있다는 식으로 거침없이 육두문자를 쏟아내던 그 시정잡배의 시절 말이다.

몬테스 알파 시리즈 중에 가장 잘 팔리는 매끈한 풍미의 카베르네 소비뇽에 비하면 카르메네르는 판매량이 12% 수준이라는데, 적어도 순대곱창볶음에서만은 네가 위너구나! 먹고 마시는 내내 오랜 친구 놈과 소주잔을 나누는 그리운 느낌이 들어 아련한 만족감에 젖어들었다.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불판에 눌어붙은 당면을 숟가락으로 벅벅 긁어먹을 수 없다는 점이랄까. 조만간 신림동 가서 쇳가루 나오도록 불판 한번 긁어보련다.

임승수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저자 reltih@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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