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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비건이라도, 김치 정도는 허용합시다!

등록 2021-11-19 10:59수정 2021-11-23 21:44

비건하고 있습니다
한국 비건인의 큰 고민 김치
비건 김치 쓰는 식당 드물어
‘김치허용주의 비건’은 어떨까
일러스트레이션 백승영
일러스트레이션 백승영

한국의 비건이 한번쯤 고민해봤을 주제를 다루려고 한다. 바로 김치다.

여기서 김치는 빨간 배추김치를 의미한다. 한국 하면 김치, 김치 하면 한국. 동물해방 운동의 선구자인 피터 싱어는 한국 사람이 아니니 이런 고민을 할 일이 없겠다. (이러면서 염치없게 내가 최근 번역한 책을 홍보해본다. 바로 피터 싱어의 최신작, <왜 비건인가?>. 절찬리 판매 중.)

최근에는 비건 김치를 인터넷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기에 집에서는 큰 불편함이 없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밖에 며칠 놔두면 완벽하게 신 김치가 탄생한다. (한○림 감사합니다!) 사실 인터넷 주문 비건 김치에 대해 알게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태껏 제로 웨이스트를 이유로 (딱히 실천을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인터넷 주문을 꺼리며 김치를 집에서 먹지 못했던 날들이 아쉬울 따름이다.

하지만 집 밖의 사정은 다르다. 모든 음식점이 아직 비건 김치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아니, 비건 김치를 사용하는 식당은 아직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아, 내가 사는 세상이 비건 세상이라면…! 하지만 내가 사는 세상은 ‘논비건’ 세상이며 김치는 전통적으로 어패류를 소금에 절여서 염장한 젓갈을 사용해 만들어진다. 어릴 적 김치 없이는 못 산다고 하는 엄마 아빠의 말을 들으면 유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중한 것은 잃고 나서야 생각나는 법이라고 했던가. 비건이 되고 나니 식당에서 즐겨 먹던 김치 반찬과 김치찌개가 당긴다. 한국에서 비건이 된다는 것은 외국에 나가 사는 것과 같은 건가 보다.

집에서 김치를 먹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라고? 그럴 수는 없다. 음식점에서 김치를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큰 격차가 존재한다. 한식당의 기본 반찬은 김치다. 양식과 중식이야 그렇다 쳐도 김밥, 파전, 돌솥비빔밥을 김치 없이 먹는다면? 가장 높은 난도는 콩국수다. 서울 진주회관 조박사님이 진하게 만든 콩국수를 시켜놓고 김치를 못 먹는다면? 이것이 바로 익스트림 비거니즘이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나는 진주회관 콩국수를 먹을 때 김치를 먹은 적이 있다.

김치와 비거니즘에 대한 사유는 채식의 역사와 국가별 특성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한다. 비거니즘이 시작된 영국의 식문화는 한국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서구권 음식은 유제품이 주를 이루고 있으므로 이를 끊기가 매우 어렵다. 영국의 채식주의는 육고기를 먹지 않되 유제품은 먹는 운동으로 시작했다가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가 유제품까지 먹지 않는 비거니즘으로 발전하였다. 발효 식품을 기본으로 하는 한식에서는 장과 젓갈이 중요하고, 국물 요리에는 기본적으로 멸치 육수를 사용한다. 게다가 한식에서 국물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분식점이나 중국 음식점에 가서 밥 요리를 주문하면 국을 기본 찬으로 제공한다. 오죽하면 고깃덩어리를 먹지 않되 고기를 우린 육수까지는 허용하는 ‘비덩주의’(비(非)덩어리 주의)가 한국 고유의 채식 방법으로 자리잡았을까.

한국에서는 한국에 맞춰 운동을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락토, 오보, 페스코 등 라틴어로 분류되는 영어 채식주의는 이해하기 어렵다. 분류 기준도 우리나라 식문화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기에 그대로 실천하기에는 애로사항이 많다. 한국에는 비덩주의자에 이어 더 많은 채식 분류가 생겨나야 한다. 이를테면 김치허용주의자랄지.

모든 동물성 제품의 소비를 하지 않는 철저한 비건에게 김치까지는 허용하는 비건이 섭섭하게 느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스며들어야 번질 수 있는 법이다. 김치를 먹는 비거니즘이 진입 장벽을 낮출 수 있다면, 그래서 더욱 윤리적인 사고와 실천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닐까? 애매한 비건이 많아질수록 비건 김치도 많아지고 채수도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진주회관에서 콩국수와 함께 비건 김치를 먹을 날이 오겠지.

조금 더 솔직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비건은 자신의 욕구에 솔직하지 않으면 지속하기 힘들다. 세상에는 곪는 속성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이것은 우리 생각이나 마음가짐에도 해당된다. 그러니 가끔 외쳐보자. 나는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 다행히도 21세기의 비건은 비건 치즈와 비건 김치를 먹을 수 있다.

사실 나는 이 문제가 해결된 지 조금 되었다. 나와 같은 비건인 OOO이 다 알아서 해주기 때문이다. 떨어질 만하면 알아서 비건 김치를 주문해주고, 그게 밍밍하면 알아서 신맛이 나도록 요리해주고, 김치볶음밥도 해주고…. 사실 이 글도 OOO 없이는 쓸 수 없었다. OOO은 글을 쓰게 하고 김치를 먹게 한다. 그것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가지다. OOO 없이는 몬 살 아!

홍성환 비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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