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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다문화거리에서 만난 다양한 새해의 맛!

등록 2022-01-01 10:37수정 2022-01-01 14:17

안산 다문화거리의 새해
다국적 식당만 50여곳, 한국 최대 다문화 상권 형성
새해 음식 베트남 쌈 요리·러시아 회무침 맛볼 수 있어
원초적 현지 맛·여행 굶주린 한국인 방문 늘어나는 추세
디유히엔콴에 만든 베트남의 다양한 새해맞이 음식.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디유히엔콴에 만든 베트남의 다양한 새해맞이 음식.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트럭이 후진할 때 나오는 단음 전자음의 캐럴 멜로디가 울렸다. 사람이 없는 100석가량의 식당. 카운터에는 머리가 세기 시작한 아담한 체구의 남자가 서 있었다. 마스크 사이로 이국적인 냄새가 파고들었다. 미국식 베트남 쌀국수 식당에서는 나지 않는, 베트남의 쌀국수 식당에서 나는 피시 소스의 향이었다. 그 냄새와 소리 사이에서 남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베트남 음식점 디유히엔콴의 임형섭 대표. 경기 안산 다문화거리에서 맛볼 수 있는 세계의 새해 음식점을 찾아다니던 중 만나게 된 인연이었다.

주민 70% 외국인

안산은 한국 최대 규모의 다문화 상권이 형성된 곳이다. 안산시 외국인주민지원본부 누리집에 등재된 음식점만 50여곳, 다문화거리가 있는 원곡동은 11월 안산시 통계자료 기준 등록 주민 2만100명의 약 70%인 1만4038명이 외국인이다. 이 수치는 안산 다문화거리의 실질적인 느낌을 설명하기는 약간 부족하다. 안산 다문화거리의 규모는 거주인구가 아닌 유동인구로 더욱 증명된다. 해외 거주 한국인들이 코리아타운에 가듯 한국 거주 외국인들은 안산 다문화거리에 간다. 티머니 교통통계를 보면 코로나19 창궐 직전인 2019년 11월 안산선 안산역의 하차승객 수는 39만명에 달했다. 디유히엔콴이 약 100석 정도 되는 큰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지난달 기준 안산역 하차승객 수는 30여만명으로 약 30% 감소했다.

디유히엔콴의 임형섭 대표.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디유히엔콴의 임형섭 대표.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디유히엔콴은 2005년 처음 문을 연 곳으로 임 대표는 2014년 식당을 인수한 네번째 대표다. 첫 주인은 베트남인이고 몇번의 손바뀜을 거쳤다. 임 대표가 이 가게를 인수한 사연은 두가지다. 하나는 퇴직, 하나는 가족. 그가 다니던 회사에서 퇴직하던 2014년 베트남인 아내가 이 식당이 매물로 나왔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그는 식당 인수를 결정했다.

“한국 사람 입맛에 맞추지 말라고 했어요.” 그의 말처럼 주인이 바뀌었을 뿐 변한 건 없다. 그래서 디유히엔콴의 쌀국수는 한국의 도시에서 쌀국수를 먹던 사람에게는 낯설 수도 있다. 고수 등 생채소가 줄기째 따라 나오고, 국물은 맑은 고기 국물 맛과 동시에 조미료 특유의 감칠맛이 올라온다. 베트남에 가본 사람들이라면 ‘어, 이 맛’ 싶은 바로 그 베트남의 맛이다. 사람이 적은 시간을 골라 취재를 갔는데도 베트남 여성 두명이 샐러드처럼 채소 잎을 따 먹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향 맛이랑 비슷해서 여기 자주 와요”라고 채소 잎을 따 먹던 이수아씨가 말했다. 이들은 결혼 때문에 한국에 왔다고 했다. 다문화사회 사람들이 한국에 정착하는 이유 중 하나가 결혼이다. 임형섭 대표도 베트남인 아내 때문에 디유히엔콴을 인수했다.

베트남 음식점 디유히엔콴의 외관.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베트남 음식점 디유히엔콴의 외관.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익숙하지만 낯선 맛

결혼과 더불어 외국인이 한국에 정착하는 또 다른 큰 이유는 ‘노동’이다. 이주노동자들은 주말마다 와서 음식을 먹고 식재료를 사 간다. 그래서 디유히엔콴 한쪽에는 베트남 식재료를 판매하는 쇼케이스가 있다. 안산에서는 일반적인 분위기다. 취재를 위해 찾았던 필리핀 식당 쿠시낭 피노이도 매장 한쪽에 필리핀 슈퍼마켓 섹션을 마련해두었고, 인도네시아 식당 바타비아도 건물 2층이 슈퍼마켓이고 3층이 식당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이 설날에 먹는 음식을 부탁하자 베트남 셰프가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려 왔다. 베트남 햄을 수육처럼 잘라서 장식한 음식은 생채소와 함께 싸 먹는다. 베트남 음식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튀김 요리와 한국의 장조림처럼 돼지고기와 메추리알을 간장 맛 소스와 함께 삶은 음식도 나왔다. 고추 소스를 발라 구운 닭은 생긴 것부터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 같았고, 갓장아찌 같은 음식이 한국의 김치나 서양 음식의 피클 구실을 했다. 요리들이 전반적으로 한국인의 입맛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베트남 오이를 넣은 듯한 수프의 맛이 독특했다. 오이수프라는 발상과 물에 익힌 오이의 질감은 괜찮았으나 냄새가 낯설었다. 한국인에게 낯설 만큼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그리운 맛일 것이다. 오늘 소개한 메뉴는 메뉴에는 없지만 요청이 오면 해준다고 했다.

오이수프.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오이수프.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이 식당에 그냥 들어가면 한국인이 사장임을 알 수도 없다. 손님도 베트남 사람, 서빙도 베트남 사람, 요리도 베트남 사람이 한다. 같은 베트남 사람들이어도 모두 사정과 상황이 다르다. 요리사는 한국어를 아직도 거의 못 한다. 서빙하는 아르바이트생은 베트남에서 괜찮은 집안 출신이라 한국의 대학교로 유학을 와서 경영학 석사 과정 중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안산에 모여 쌀국수를 먹는다.

안산 다문화거리의 특징은 한 국가가 아니라 매우 많은 국가의 사람들이 모여 상권을 이룬다는 점이다. 디유히엔콴이 있는 곳은 일종의 베트남 구역이라 근처에 베트남 식당 두곳이 더 있다. 그러나 취재를 사양한 인도네시아 식당 크다이 린자니의 대표 말에 따르면 “안산에 인도네시아 식당이 10곳쯤 있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지는 않는다”고 한다. 한국 사람이 알 수 없는 다양한 사정이 있는 것 같다.

종교·풍습마다 다른 새해맞이

새해를 맞는 방법도 다르다. 예를 들어 타이나 캄보디아 식당은 1월1일에 새해맞이를 하지 않는다. 불교 국가라 양력설엔 특별한 행사가 없기 때문이었다. 필리핀 식당 쿠시낭 피노이는 1월1일 대신 크리스마스 파티를 먼저 했다. 우즈베키스탄 음식을 취급하는 ‘우즈벡 식당’에 취재를 문의하자 “우즈베키스탄은 이슬람 국가라 1월1일에 딱히 축하하지 않는다. 우리 명절이 따로 있어서 1월1일은 달력이 바뀌는 날로만 느껴진다”는 대답을 들었다. 1월1일에 여러가지를 많이 먹는 나라는 러시아인데, 러시아 음식을 먹으려면 다문화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땟골 고려인 마을로 가야 한다.

에비뉴에서 만든 러시아 새해맞이 음식 양고기 국수.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에비뉴에서 만든 러시아 새해맞이 음식 양고기 국수.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러시아의 새해 음식을 준비해준 곳은 에비뉴다. 에비뉴는 전에 빅토리아였다가 사장이 바뀌면서 이름도 변했다. 에비뉴의 특징은 메뉴에 고려인 음식이 있다는 점이다. 고려인은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CIS)에 사는 한국인 동포를 말한다. 에비뉴의 사장인 아나톨리도 고려인이다. 카자흐스탄 출신이고 한국에서는 공사 때 사용하는 샌드위치 패널 회사에서 6년 일하다가 식당을 인수했다. 한국 동포들의 타국 생존기와 큰 차이가 없다.

아나톨리는 자신들이 새해에 먹는 음식 3개를 준비해주었다. 샐러드와 국수, 그리고 고려인풍 회무침. 샐러드는 햄, 삶은 달걀, 당근, 감자, 완두콩, 피클을 넣고 마요네즈와 후추로 버무린다. 예상 가능한 맛인데 샐러드치고는 칼로리가 상당히 느껴져서 ‘추운 나라의 음식은 이런 건가’ 싶었다. 국수는 별도의 양념 없이 만든 양고기 국물과 수육 사이로 수제비처럼 넓은 면을 곁들인 형태다. 역시 뜨끈하고 기름져서 겨울에도 반팔을 입는다는 중앙아시아인들의 체력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고려인의 회무침이 인상적이었다. 겉보기엔 한국 회무침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먹어보면 유럽의 생선 샐러드인 세비체에 더 가깝다. 흰살 생선에 피망, 파프리카, 홍고추와 풋고추, 파, 양파를 섞고 고추기름으로 버무린 뒤 고수를 섞는다. 유라시아 대륙 건너편에서 한반도인들이 이런 식으로 고향의 맛을 재현했다고 생각하면 왠지 아련해진다.

러시아의 새해맞이 음식들.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러시아의 새해맞이 음식들.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감춰진 코스모폴리스

보통 식당 취재를 가면 해당 동네에 자리 잡은 이유와 향후 목표 따위를 묻는다. 아나톨리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뭐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들의 식당은 사치 소비로의 미식이 아닌(맛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생활의 공간이다. “코로나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전에는 50명 왔다가 이제는 20명 와요. 돈 벌어야 하는데. 9개월 전에 셋째 태어났어. 돈 벌어야 해요.”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어를 할 줄 몰랐다던 아나톨리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말했다.

에비뉴의 외관.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에비뉴의 외관.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한국보다 잘사는 나라 사람들이 오는 이태원은 ‘다문화’라고 부르지 않고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 사람들이 사는 안산은 다문화거리라고 부르지. 다문화 자체가 차별적인 말이야.” 안산에서 가구 공장을 운영하는 김정환(38)씨가 해준 말이다. 실제로 다문화는 일종의 고유명사다. 취재 중 만난 필리핀 분들은 영어로 말하다가도 ‘다문화’만 한국어 그대로 말했다. 안산 다문화거리는 한국인에게 드러나지 않은 코스모폴리스다. 요즘 같은 평점 시대에도 안산 다문화식당에 대한 한국어 검색 결과나 평가는 거의 없다. 안산 다문화거리에 주로 오는 사람들은 한반도 전역에 거주하며 고향의 맛과 식재료를 찾는 노동자들이다. 이미 한국 사회에 없어선 안 될 노동력이지만 도시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곳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의 현재를 보여주는 프리즘이다.

난민이나 이주노동자 등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 여전한 가운데 안산 다문화거리를 찾는 한국인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디유히엔콴에는 베트남 여행을 가본 한국인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해외여행길이 막혔으니 현지 그대로의 음식을 먹기 위해서다. 에비뉴에도 러시아의 맛을 보고 싶은 한국인들이 조금씩 찾아오는 추세다.

국제화 사회나 다양성 같은 공허한 구호를 말하기보다 다문화거리에 한번쯤 가보면 어떨까. 21세기의 한국과 한국 속의 세계가 한 거리에 있다.

안산/박찬용 칼럼니스트 iaminseo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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