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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첫 ‘비건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이들에게

등록 2022-01-03 15:30수정 2022-01-03 15:35

비건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경험’ 만끽하되
마지막 크리스마스 될
동물들도 떠올려보자
일러스트레이션 백승영
일러스트레이션 백승영

크리스마스 장식이 온 거리에 걸렸다. 빨간색 초록색 방울로 장식된 트리나 형형색색의 불빛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하지만, 나를 가장 들뜨게 하는 것은 캐럴이다. 왜인지 캐럴을 듣다 보면 옛날의 한국을 상상하게 된다.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지지 않는 연말은 얼마나 춥고 고되었을까? 아마 일부 포유류가 그렇듯 겨울잠을 자며 봄을 기다리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노래나 명절의 도움 없이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봄을 기다린 문화권이기에 봄을 앞둔 설날을 민족의 대명절로 삼아 성대하게 보내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한해를 마무리하며 새로운 해를 준비하는 시기라는 점에서 크리스마스는 시작과 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나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그해에 처음으로 해본 일을 적으며 한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올해를 돌아보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두루미도 보고, 소와 교감하고, 도살장에서 개도 구조하고, 타투도 하고, 책 번역도 하고, 칼럼도 쓰고, 강연에서 아는 척도 하고…. 전부 처음 해본 것이다. 게다가 이번 크리스마스는 처음으로 세 고양이와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이자 ○○○과 함께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이기도 하다.

처음이라 하면 신나면서도 동시에 긴장된다. 기후위기나 동물권, 혹은 건강의 이유로 비건을 시작한 사람에게는 올해가 처음으로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비건 식당에 가거나 집에서 비건 요리를 선보이는 크리스마스일 것이다. 가족이 비건 식당을 싫어하면 어쩌지? 친구가 왜 고기가 나오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리지는 않을까? 떨리는 마음은 처음에만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감정이다. 나중에는 전부 추억이 될 처음의 순간을 즐기며 충분히 만끽하길 바란다.

하지만 모든 처음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산타클로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순간 충격과 실망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올해 처음으로 기후생태위기를 실감한 사람이나 그 위기의 심각성을 알게 된 사람에게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는 어떤 느낌일까?

매년 연말은 지구 온도 1.5℃ 상승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는 불편한 시기다. 올해 겨울이 유독 따듯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예보를 보면 북극의 해빙이 심화하고 제트기류가 느슨해져 지난해보다 추운 혹한이 예상된다. 우리는 매년 ‘역대급’ 장마, 폭염, 태풍, 산불과 같은 이상기후와 기후재난을 처음으로 맞이한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여러 의미에서 마지막 크리스마스이기도 하다. 올해 3월, 화재와 산림 파괴로 황폐해진 아마존이 급기야 탄소 배출원이 되었다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과학계에서는 아마존의 사막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미 기후위기로 인한 불가역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당연시하며 누렸던 어떤 날씨와 풍경이 올해가 마지막이었을 수도 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크리스마스 거리에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즐비할 것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번이 마지막 크리스마스일 존재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이제 지구에 60마리밖에 남지 않은 자바코뿔소에게는 이번이 마지막 크리스마스일 수 있다. 자망 어업에 의해 종이 말살당하고 이제는 30마리밖에 남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돌고래 바키타에게도 이번이 마지막 크리스마스일 수 있다. 심각한 멸종 위기에 처한 산악고릴라, 오랑우탄, 호랑이, 바다거북, 아시아코끼리종은 다음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을까? 사육장이나 도살장에서 생을 마감할 수많은 동물들은?

첫번째 비건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모든 이에게 축하를 건네고 싶다. 동시에 올해가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될 모든 이를 애도한다.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지구 온도 1.5℃ 상승에 대한 불안과 우울을 느낄 모든 이에게 우리는 바꿀 수 있다고 감히 말해보고 싶다.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올해 크리스마스에 바랐던 변화가 현실이 되기를. 이를 위해 모두가 함께 상상하고 발견하고 실천하기를. 메리 크리스마스!

홍성환(비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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