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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3천원 짜리 엘피, 지금은 3만원…“이런 호황 처음 봐”

등록 2022-02-10 08:59수정 2022-02-10 10:28

[ESC] 질주하는 LP시장
미국선 CD판매 앞질러…최근 가요 앨범 10배 올라
시중에 풀린 풍부한 자금이 한정 자산 구매로 몰려
아이유 ‘꽃갈피’ 200만원…유행 넘어 자산 가치 인정
서울 중구 신당동의 ‘모자이크 서울’ 내부.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서울 중구 신당동의 ‘모자이크 서울’ 내부.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후회가 막심해요.”

입춘이 지났는데도 손이 곱을 만큼 차가운 바람이 불던 지난 5일 토요일 낮의 종로5가, 리어카 위에 엘피(LP)를 차곡차곡 꽂아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종로레코드 최호준(60) 사장이었다. 그는 25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 때부터 세운상가 앞 노상에서 엘피 판매를 시작했다. “내가 음악을 좋아해서, 그때는 집에 있는 판을 팔았지. 세운상가 앞에서는 노점을 못하게 해서 2014년에 여기로 왔어요. 클래식, 재즈, 록, 장르별로 다 있지. 손님에게 맞춰야 하니까.” 그가 후회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판이 없어서 못 팔아요.”

•코로나에 엘피만 잘된다?

“제가 아날로그를 좋아해서요.” 영화 전공이라는 대학생 이재민(21)씨도 엘피 비닐봉지를 들고 말했다. 사전 취재차 종로레코드를 찾은 날 마스크로도 젊음을 가릴 수 없는 남자 대학생 3명이 먼지를 만져가며 엘피를 고르고 있었다. 이씨는 그 일행 중 한명. 그는 재즈 뮤지션 마일스 데이비스의 엘피를 3만원 주고 사 갔다.

“창고에는 엘피가 더 많아요. 그걸 젊은이들에게 도매가로도 많이 줬어요. 요즘 이 시장에 젊은 사람들도 뛰어들었어요. 최근 특히 가요 판 가격이 많이 올랐죠.” 그가 마침 재킷의 먼지를 닦던 앨범이 ‘봄여름가을겨울 라이브’였다. “이거 ‘나가수’ 하던 6~7년 전만 해도 3000원씩 했어요. 지금은 3만원이에요.” 수익률로 치면 1000%다.

엘피 노점 종로레코드의 외관.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엘피 노점 종로레코드의 외관.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우리끼리는 그런 말을 해요. 코로나에 엘피만 잘되나 싶다니까요.” 최 사장은 25년 동안 엘피를 팔면서 요즘 같은 호황은 처음 본다고 했다. 사실 엘피 가격 폭등은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코로나19가 야기한 전지구적 나비효과 중 하나는 자산화가 가능한 수집품 및 사치품 가격의 폭등이다. 고가 와인, 위스키, 기계식 손목시계, 한정판 스니커즈, 클래식 카 등의 가격이 코로나19 창궐과 함께 치솟았다. 국가가 돈을 풀자 암호화폐 시장이나 부동산이 들썩였다. 풀린 돈의 일부는 수량이 한정된 물건들로 흘러갔다. 그 결과 엘피 가격이 뛰었고, 종로5가의 레코드 노점도 엘피 물량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지난해 미국에선 엘피가 4000만장 넘게 팔리면서 시디(CD) 판매량을 앞지르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블랙핑크, 성시경 등 인기 가수들이 엘피 음반을 내고 있고, 이것들은 정식 발매 전 예약 단계에서 이미 판매가 끝난다. 아날로그를 선호하는 엠제트(MZ)세대의 레트로 열풍까지 더해져, 엘피는 현재 가장 뜨거운 수집품 가운데 하나가 됐다.

엘피 수집이 세계적인 현상이 되자 시장은 들썩이고 있다. 특히 ‘수집 덕후’가 많은 일본이 한국 중고 엘피 시장에까지 손을 뻗치며 엘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상황. 서울 중구 회현역 지하상가의 한 중고 엘피상은 “몇년 전부터 산울림 앨범을 일본 수집가들이 싹쓸이하고 있다. 작품성 좋은 국내 가요 앨범이 주요 수집 대상이다”라고 말했다.

서울 중구 신당동 엘피숍 ‘모자이크 서울’에서 5일 한 손님이 엘피 위에 바늘(카트리지)을 올리고 있다.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서울 중구 신당동 엘피숍 ‘모자이크 서울’에서 5일 한 손님이 엘피 위에 바늘(카트리지)을 올리고 있다.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의 라이브 앨범.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의 라이브 앨범.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 재미있게 음반 소비하는 방법

“오, 그건 비밀이지.” 종로5가에서 20분 정도 거리의 중구 신당동 다세대주택가 안쪽에 있는 작은 가게, 키가 1m90은 될 것 같은 외국인이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다. 그의 이름은 커티스 캄부, 영화제로 유명한 프랑스 칸 옆의 니스에서 왔다. 한국에 10년 정도 머무르며 완벽한 한국말을 구사하게 되어 통화 도중 “아이고 이 사람아” 같은 말을 쓰는 수준까지 왔다. 그가 말한 ‘비밀’은 엘피 수급 방법이다. “엘피 장사는 독특한 장사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해줄 수는 없어.” 그는 지금 서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레코드 가게인 모자이크 서울의 대표다.

모자이크 서울은 종로레코드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점은 같다. 이곳은 대표인 커티스 자신이 좋아하는 음반 위주로 꾸려져 있다. “브라질 음악이나 아프리카 댄스인 ‘아프로’ 음악은 한국에서 우리가 가장 많을 거예요.” 커티스가 말했다.

굳이 종로레코드와 다른 점을 꼽자면 꼼꼼한 ‘분류’다. 모자이크 서울에서 파는 엘피에는 모두 장르와 발매연도와 가격이 붙어 있다. 가게의 정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크지 않은 가게인데 청음용 턴테이블도 두 개 있어서 어떤 노래인지 들어보고 살 수도 있고, 음료도 파니 커피를 마실 수도 있다. 여러모로 요즘 분위기에 잘 맞는 레코드 가게라서인지 인기도 많다. “손님 다양해요. 수집가도 오고, 음악에 관심 있는 사람도 오고, 미친놈도 오고, 또라이도 온다.” 커티스가 웃으며 말했다.

모자이크 서울의 대표 커티스 캄부.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모자이크 서울의 대표 커티스 캄부.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색다르게 음악을 즐기는 방법이지. 음악을 듣는 의미에 집중하는 거야.” 커티스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며 지금의 엘피 인기에 대해 날카로운 식견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음악 듣기에 지쳤어. 재미가 없는 거야. 음식이랑 똑같아. 요즘엔 한 끼도 대충 때우기 위해 아무 식당에 가지 않잖아. 엘피는 음악을 재미있게 소비하는 방법 중의 하나고, 나만의 음악 라이브러리라고 봐.”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취재를 하는 동안에도 모자이크에는 젊은이들이 드나들었다. 하나같이 예쁘고 개성있는 옷차림이었다. 적어도 이들에게 엘피는 골동품은 아닌 셈이다.

LP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성이 장점 중의 하나다.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LP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성이 장점 중의 하나다.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 투명한 시세 정보 공개도 한몫

“내 첫 엘피는 2002년쯤 생긴 유재하 1집이었어. 그 앨범은 말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 ‘이거 얼마예요?’라고 물어봤더니 가게 사장님이 그냥 가져가라고 했어.” 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디제이(DJ)이자 음악 전문 에디터인 유지성(38)씨가 회상했다. 그는 이후 힙합을 거쳐 디스코와 하우스를 듣다 프로페셔널 디제이가 되었다. 그 역시 엘피 시장의 큰 성장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일본 시티 팝과 한국 가요 레코드 시세가 많이 올랐지. 나도 요즘은 구하기 힘들 정도야.” 유지성을 포함해 취재에 응해준 많은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한국 레코드판의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말했다. 가수 아이유의 ‘꽃갈피’ 앨범 미개봉 엘피는 현재 200만원 안팎의 가격표가 붙어 있다.

서울 중구 회현역 지하상가의 엘피숍.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서울 중구 회현역 지하상가의 엘피숍.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엘피의 인기를 아날로그의 반격이라 해석하는 건 이 상황을 반만 보는 것이다. 엘피의 인기야말로 인터넷과 스트리밍의 산물이다. 인터넷 문화의 정착으로 수집품의 세계적인 시세가 드러나며 수집에서의 투명성이 높아졌다. 모자이크 서울의 인기 비결 중에는 해외와 다름없는 시세에 귀한 엘피를 살 수 있다는 점도 있다.

아울러 스트리밍 서비스로 세계의 거의 모든 음악을 듣게 되자 두 가지 파생효과가 생겼다. 실체가 없는 스트리밍을 손으로 만지고 싶은 욕구, 다른 하나는 스트리밍으로는 가질 수 없는 음원을 갖고 싶은 욕구. 거기에 더해 ‘아이유 꽃갈피 미개봉 200만원’처럼 자산 수준의 엘피까지 나왔다. 엘피는 이제 한때 감성의 유행이 아니다. 독특한 모습의 21세기형 엘피 시장이 완성된 것이다. 박찬용 칼럼니스트 iaminseo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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