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문화유적을 간직한 경주의 남산. 김강은 제공
경주 남산
높이: 468m
코스: 삼릉 탐방 지원센터-상선암-바둑바위-금오봉-원점회귀
거리: 약 5.5㎞
소요시간: 약 2시간30분
난이도: ★★☆
호기로운 꿈이 있었다. 바로 ‘100살 때까지 등산하는 할머니가 되는 것’. 가파른 바위산도 뛰어다니던 20대 때는 ‘까짓것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조금씩 몸의 변화가 체감되고 최근 교통사고 이후 허리 부상까지 쉬이 낫지 않자, 그게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왜 늘 잃어봐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될까. 아파보니, 건강이 최우선 순위가 되었다. 올해는 의욕대로 하기보다 내 건강의 지속가능성을 찾아보기로. 다시 낮은 산부터 차근차근 걸어보기로 결심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즐겨야, 좋아하는 산도 더 오래 좋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활하는 사이 봄이라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새싹이 움트기 직전의 씨앗처럼 몸도 근질거렸다. 때마침 나의 가장 가까운 산 선배이자 산 벗인 아빠가 쏠쏠한 제안을 건네셨다. “이번 주말, 엄마랑 셋이 같이 경주 남산에 갈까?”
해발 468m의 완만한 경사의 산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빠는 카메라를 들고, 엄마와 나는 작은 배낭을 메고 그렇게 세 사람의 동행이 시작됐다.
경주는 잘 보존된 신라 문화유적과 조화로운 자연경관 때문에 지리산에 이어 두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중 남산은 남북 8㎞, 동서 4㎞로 작은 산이지만 40개의 산줄기를 따라 13개의 왕릉을 비롯해 4개의 산성을 품고, 절터 112곳, 석불 80체, 석탑 61기 등 유물·유적이 있어 지붕 없는 노천 박물관으로 통한다.
삼릉숲을 시작으로 정상인 금오봉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저마다 자유분방한 굴곡을 뽐내는 소나무숲이 반겼다. 빽빽한 소나무숲 산책로에 들어서니 마음이 편안하고 고즈넉하다. 삼릉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선각 마애불의 대표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통일신라 시대 양식을 잘 보여주는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등 발길 닿는 곳곳마다 문화유적이다. 등산로가 곧 문화유산 탐방로인 것이다. 꽤 경사 있는 돌계단이 이어져도 마음을 여유롭게 먹고 곳곳의 유적지를 구경하다 보니 힘든 것도 까먹어버렸다.
천천히 약 한시간을 오르니 작은 암자가 나타났다. 한번쯤 쉬어 가야 한다는 상선암이다. 무인 판매하는 1천원짜리 커피 믹스 한잔에 세상의 달콤함을 다 모아놓은 듯했다. 산 풍경은 반찬, 상쾌한 산 공기가 최고의 양념이 되어주었다.
조금 더 힘을 내어 바둑바위에 올라섰다. 평평한 바위 너머로 넓디넓은 서라벌 벌판과 형산강이 시원하게 펼쳐지며 바람이 불어왔다. 바위 틈새마다 소나무가 가득했다. 봄의 파릇함도, 여름의 녹진함도 아닌 경주 소나무만의 따스한 초록빛에 마음을 녹이고, 세상의 근심 걱정을 쓸어가는 듯한 바람 소리를 벗 삼아 바위 능선 길을 걸었다. 엄마 아빠와 나란히 걷기도, 앞서거니 뒤서거니도 하면서.
능선 길을 걷다가 조망터에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남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새겨진 6m 규모의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이 내다보였다. 바위 속에서 참선하다 세상에 나온 듯한 모습에 과연 부처를 품은 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1㎞ 정도의 능선 길을 걸으면 어렵지 않게 금오봉에 도착한다.
하산하며 두 손을 맞잡고 의지하며 걸어가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마주했다. 어린 시절엔 억지로 끌려다니던 산을, 이제는 자의로 부모님과 동행하다니! 감회가 새롭다. 산은 날씨나 계절과 같은 외적인 요인에 모습을 바꾸기도 하지만 오르는 자의 내적 요인에 따라서도 다르게 다가온다. 어제의 산은 내게 놀이터였다면, 이날의 경주 남산은 대화의 장이자 새로운 속도로 함께 호흡하는 유연한 동행 길이었다.
경주 남산의 별미 들깨 칼국수와 지역 막걸리로 산행을 마무리하며 부모님과 종종 이런 시간을 가지자 약속했다. 몸과 마음은 물론 관계의 건강함에 한 걸음 다가간 시간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언제든 편안한 호흡으로 함께 걸어보고 싶은 길이었다.
김강은(벽화가·하이킹 아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