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가볍게 읽고 넘겨야 할 비거니즘 칼럼에서 음식 이야기는 안 하고 웬 전쟁 이야기냐고? 이 전쟁이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나에게 가장 중요한 현안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는 비거니즘이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행동이자 연대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어차피 동물이다. 지금도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러시아군의 불법 침공과 전쟁범죄로 인해 그들의 권리를 침해당하며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내가 바라는 비거니즘은 ‘인간 동물’의 권리를 위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고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유럽을 선두로 전세계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전쟁 2일차부터 각 나라들이 러시아를 제재하고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구호물품을 보내기 시작했고 한국 정부도 대러 제재와 우크라이나의 인도적인 지원에 참여했다. 하지만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세계 시민 개개인의 참여와 지지 행동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반대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길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구호물품과 지원을 보내기 위해 돈을 모으거나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향한다. 러시아에서도 용감한 시민들이 길거리로 나와 반전시위를 펼치고 있으며 이미 수천명의 시위 참가자가 체포되었다. 모두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무엇일지 고민하고 있다.
비거니즘 또한 나의 ‘할 수 있음’이다. 비거니즘은 동물성 제품의 소비를 거부함으로써 끔찍한 고통과 착취를 유발하고 기후생태 위기를 가속하는 산업을 거부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일종의 보이콧 행동이다. 이 비거니즘을 지속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 실천이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실천은 무용한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 시민운동은 시민 개개인이 모여 목소리를 내는 것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을 두며 모임에 나가거나, 정보를 공유하거나, 거리로 나오는 개인의 실천으로부터 시작된다. 미국 인권 운동은 로자 파크스가 버스의 백인 전용석에 착석하면서 경찰에 체포되는 시민 불복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에 전국적인 3·1 운동을 통해 독립의 기반을 마련했고, 촛불 혁명을 통해 민주적인 힘으로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다. 모두 변화를 요구하는 개인의 행동과 목소리들이 만나 만든 역사다.
그 역사는 오늘도 전세계에서 행동을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전쟁에 휘말린 국가, 탄압받는 국가, 그리고 이웃 시민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모여 변화를 요구한다.
러시아에 대한 제재로 크게 고통받을 이는 독재자 푸틴이 아닌 러시아 시민이다. 하지만 푸틴을 끌어내릴 수 있는 이들 또한 러시아 시민이 아닌가? 크렘린의 경우 대러 제재가 지속된다고 한들 북한처럼 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면 그만이지만, 그 제재를 통해 대규모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변화를 요구한다면 푸틴과 현 러시아 정부는 최대의 위기에 봉착할 것이다. 비폭력 시민운동을 연구한 에리카 체노웨스는 사회 체제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인구 전체의 3.5%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3.5%에 해당하는 개개인의 실천이 있다면 그 실천이 사회를 바꿀 수 있으며, 충분한 수의 러시아 시민이 본인의 ‘할 수 있음’을 믿는다면 정권을 교체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150만명의 비건이 있다면 한국 축산업의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비거니즘은 개인의 ‘할 수 있음’을 믿는 개인행동이지만 동시에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연대 행위이기도 하다.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행위는 목소리가 무시당하는 이들과의 연대이자 착취당하는 대상과의 연대이다. 그리고 이 연대의 행동은 공감대의 확장을 통해 시작되고 발전한다.
오늘도 우크라이나 시민의 생존과 삶의 방식이 위협받고 있다. 이들과 같이 동물의 권리가 짓밟힐 때, 무고한 생명이 잔인하고 무참히 학살당할 때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비거니즘과 동물권은 무슨 소용일까? 그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연대의 목소리를 높이자.
우크라이나에 영광을!(Слава Україні!)
홍성환(비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