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 작업 중인 모노룸 유호석 대표.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봄의 기운이 완연하게 느껴지던 지난 3일, 서울 홍대 인근의 한 사무실. 문을 열고 입구에 들어서자 마스크 안으로 향긋한 향기가 흘러들어왔다. ‘제대로 찾아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곳은 유호석(31)·이나연(30) 부부가 공동대표로 있는 프레이그런스 스튜디오 ‘모노룸’. 온라인 교육 플랫폼 ‘클래스101’에서 수강생 만족도가 99%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높은 조향 강좌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작은 쇼룸과 조향 작업실이 있는 소박한 공간이었지만 좋은 향기가 가득했다.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업’되는 느낌이었다.
“하얀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해요.” 이나연 대표는 새로운 향을 만드는 작업을 이렇게 설명했다. 수백, 수천가지의 원료를 배합해 차별화된 향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후각은 금세 마비되기 때문에 작업 시간이 길어지면 더욱 답을 찾기 어려워진다.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이유다.
모노룸 이나연 대표가 개발 중인 향수의 향을 맡고 있다.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어떤 상황에서 향수를 뿌릴지도 고민해야 해요. 향의 종류, 강도까지 전부 계산에 넣어야 합니다. 편안한 휴식을 원하는 사람에게 강렬한 향은 오히려 방해되죠”라고 말한 이 대표는 최근 인기가 높다는 ‘고요’라는 향수를 맡게 해주었다. 새벽녘 고요한 숲의 향을 느끼게 해준다는 이 향수는 말 그대로 이슬에 젖은 풀잎 같은 은은한 향을 퍼뜨렸다. 일반 향수에선 만날 수 없는 개성 있는 향이었다. “아, 좋네요”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모노룸처럼 소규모 업체에서 조향사의 개성을 듬뿍 담아 만든 향수를 ‘인디 향수’라 부른다. 기존 대형 패션·화장품 브랜드에서 내는 브랜드 향수와 차별화된 향을 자랑한다. 소수를 위한 프리미엄 향수인 ‘니치 향수’와 지향점은 비슷하지만, 니치 향수보다 가격이 저렴한 것이 특징이다. 니치 향수 업체에서 향수를 만들던 조향사들이 나와 창업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향수 제조를 위해 사용하는 향수 원료들. 다양한 원료가 만나 하나의 향수가 탄생한다.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장소협찬 모노룸
이런 ‘작은 향수’들의 큰 특징은 브랜드 향수에선 느낄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이 있다는 점. 또 남녀의 구분이 없는 젠더리스를 지향한다. 브랜드 향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호불호’ 없는 향인 플로럴(꽃), 시트러스(감귤) 계열 향은 이 세계에선 인기가 없다. 대부분 우디(나무껍질), 어시(흙) 같은 그윽하고 인상이 뚜렷한 향이 지배적이다.
최근 향수 시장은 인디와 니치 향수가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딥티크, 바이레도, 엑스니힐로, 디에스앤더가 등 국내 화장품 업계에서 가장 많은 니치 향수 판권을 보유한 신세계인터내셔날에 따르면 2021년 니치 향수 브랜드의 평균 매출이 전년에 견줘 두배 이상(107.8%) 늘었고, 코로나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열배(1023%) 이상 늘었다. 태풍급 인기라도 해도 과하지 않다.
인디 향수에 집중하는 드러그스토어 ‘올리브영’의 경우 올해 1월부터 2월24일까지 인디 향수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11% 늘었다. 지난해와 견줘 판매하는 인디 향수 브랜드도 세배 이상 증가했다. 올리브영 나윤희 엠디(MD)는 “개성과 차별화된 매력을 추구하는 엠제트(MZ)세대가 향수 시장의 주요 소비자로 떠오르면서, 소수 취향인 인디 브랜드 향수가 대중화하는 추세”라며 “크림 타입 등 독특한 제형이나 트렌디한 패키지 디자인을 내세우며 향수 시장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다”고 말했다.
조향 작업 중인 모노룸 유호석 대표.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이런 성장 배경엔 코로나19가 있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적인 설명이다. 모노룸 유호석 대표는 “온종일 마스크를 써야 하고, 집 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좋은 향에 대한 수요가 생겨난 것 같다. 코로나 이후 향수를 찾는 사람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 관계자는 “마스크 장기 착용으로 색조 화장에 대한 수요가 줄고 대신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독특한 향을 즐기는 소비자가 늘어났다”며 “젠더리스 트렌드까지 더해져 남녀 구분 없는 향을 즐기는 문화가 생긴 것도 한 원인이다”라고 분석했다.
“향수는 오오티디(Outfit Of The Day·오늘의 패션)의 완성이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로 일약 스타가 된 댄서 노제가 한 방송에 나와 한 말은 현재 향수가 어느 정도로 인기인지를 보여준다. 노제도 바이레도, 딥티크 같은 니치 향수를 항상 갖고 다니는 마니아로 알려져 있다.
향수가 인기를 얻음에 따라 향수를 깊이 연구하고 수집하는 ‘덕후’들도 늘고 있다. 전시기획 업체인 리우션의 류정화(45) 공동대표도 유튜브에서 향수 리뷰를 틈틈이 살펴보는 게 취미다. 현재 아홉개의 향수(이것도 적은 편이라고 류 대표는 말했다)를 갖고 있는 류 대표는 “학생 때 도서관에 들어서면 누가 있었는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특정 브랜드 향수를 쓰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선 오이 향이 났는데 슬쩍 느껴지는 향이 참 매력적이었다”며 향수의 매력에 빠진 기억을 얘기했다.
그라펜 타투 퍼퓸의 ‘원우드’. 올리브영 제공
그는 상황에 따라 향수를 바꾼다. 쌀쌀한 계절엔 우디한 향이나 포근한 향의 향수를, 더운 날엔 물 향과 오이 향이 나는 향수를 뿌린다. 운동을 할 때는 시원하고 지속성이 강한 향수, 비즈니스 미팅이나 프레젠테이션 같은 공식적인 자리엔 차분하고 중성적인 향을 선호한다. 집에 있거나 잘 때는 달콤한 향으로 마무리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에 향수가 있는 셈이다.
여성만 향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향수는 더이상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대학원생 최희석(32)씨는 향수를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가장 빠르게 기분을 전환할 수 있어 향수를 좋아한다”는 최씨는 “무게가 있는 우디 계열의 향을 좋아하는데 바이레도의 벨벳 헤이즈를 특히 선호한다”고 말했다. 향이 주는 안정감과 무게감이 좋단다. 100㎖에 30만원 정도 하는 비싼 제품이지만 그는 거리낌 없이 지갑을 연다. 충분히 그만한 보상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고민이 생긴다. 어떤 향수가 좋을까, 나에게 맞는 향수는 무엇일까,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가장 큰 원칙은 편견을 버리고, 많은 시도를 해봐야 한다는 것. 광고나 마케팅에 휘둘리지 말고 가능하면 많이 맡아보고 가장 좋게 느껴지는 향을 골라야 한다. 가격이나 브랜드에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모노룸 유호석 대표는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남성 향, 여성 향 등의 편견을 버리고,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향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즐겨보길 바란다. 다양한 시향이 매우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향수를 모으는 애호가도 늘고 있다. 권도윤 제공
향수를 모으는 애호가도 늘고 있다. 최희석 제공
향수 활용은 패션의 대원칙인 시간(Time)·장소(Place)·상황(Occasion) 즉, 티피오(TPO)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공식적인 자리에 너무 진하고 강렬한 향수를 뿌리거나, 더운 날씨에 포근한 느낌의 향수를 뿌리면 오히려 분위기를 망칠 수 있다. 예를 들면 추운 날씨엔 바닐라 향이 감도는 달콤한 구르망(gourmand) 향, 따뜻한 날씨엔 상큼한 풀 향기가 감도는 그린 플로럴 계열이 잘 맞는다. 물론 상황별 연출법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 팁이라면 팁이다.
향수를 모으는 애호가도 늘고 있다. 류정화 제공
뿌리는 방법에도 정답은 없다. 손목과 귓불 밑에 뿌리는 게 정석이라지만, 요즘은 ‘올드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식상한 방법이다. 피부든, 옷이든 효과적인 곳에 뿌리면 된다. 이나연 대표는 “팔꿈치 안쪽이나 겨드랑이와 옆구리 사이 좀 더 넓은 부분, 아우터 안쪽과 옆구리 사이 공간, 칼라 안쪽과 목이 닿는 곳, 머리 위 등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게 좋다”며 “두개의 향수를 각기 다른 곳에 뿌리는 레이어 방법도 굉장히 효과적이다”라고 말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