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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면서도 묘하게 낯선…‘삼각지의 맛’에서 만난 청춘 [ESC]

등록 2022-03-17 08:59수정 2022-03-17 10:14

[커버스토리] 삼각지가 뜬다
서울 중심가 입지조건에 구매력 높은 상권 매력
젊은 창업인들 줄지어 입성하며 ‘용리단길’ 형성
권리금 상승 조짐 보이자 젠트리피케이션 경계도
베트남 음식점 효뜨.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베트남 음식점 효뜨.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하와이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 인근 오래된 아파트 삼각맨션 근처의 한 식당. 골목길이 보이는 부엌에서 참치를 썰던 남자가 유산지로 참치를 감싼 뒤 말했다. 삼각지역 근처의 포케 전문 식당 ‘가타부타’ 권덕(35) 대표였다. 포케는 하와이식 막회 개념의 날생선 요리다. 권씨가 하와이 음식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 그는 과거 같은 삼각지역 근처 문화거리인 ‘열정도’에서 와인 바를 운영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곧 끊임없이 밀려오는 장사의 고단함 속에서 지쳐갔다.

“하와이에 가 보니 생활도 별로 안 바쁘고, 저와 잘 맞을 것 같아서 이민을 준비했어요.”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한 것. 그러던 와중 코로나19가 터져버렸다. 그는 떠나기 전 잠시 머무른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가고 싶어 하는 하와이 콘셉트의 식당을 열었다. 그게 1년 전 일이다. 그새 가타부타는 유명 식당이 됐고 삼각지역과 인근 신용산역 사이의 조용한 주택가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핫플레이스 ‘용리단길’이 돼버렸다.

가타부타의 권덕 대표가 참치를 썰고 있다.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가타부타의 권덕 대표가 참치를 썰고 있다.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 / / /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식당 음식 맛은 주인을 닮곤 한다. 가타부타의 포케 맛도 주인장의 말씨 같았다. 속이 든든하면서도 부담이 없었다. 간장 기반으로 양념한 밥에 절인 생참치를 얹고 그 위에 잘게 썬 파나 후리카케(밥에 뿌려 먹는 일본식 조미료)를 뿌린다. 이렇게 만든 포케는 양념이 들어가 간이 맞으면서도 참치가 있어 포만감이 충분하다. 날생선이지만 밥과 함께하니 속이 부담스럽지 않다. 한국인에게 회덮밥은 익숙하지만 혀끝에 감기는 외국의 간장의 맛은 묘하게 낯설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맛, 이것이 2022년 삼각지의 맛이다.

삼각지역 인근에 최근 1~2년 사이 생긴 식당들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맛의 음식을 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삼각지역 근처가 ‘이국적인 식당이 많은 곳’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이국적인 식당은 우연히 비슷하게 도출된 결과일 뿐이다. 이런 곳들이 만들어진 실질적인 이유가 중요하다. 이 시대, 사람이 몰리는 트렌디한 식당은 ‘콘셉트’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점주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삼각지역에서 시작해 지금은 더현대 등 백화점 입점까지 성공한 꺼거나 효뜨의 경우가 좋은 예다. 꺼거의 인테리어는 영화 <중경삼림>에 나오는 홍콩풍이지만 이곳의 인테리어를 담당한 사람들은 홍콩에 가본 적이 없다. 디자인 전공자 등으로 이루어진 꺼거 대표의 친구들이 핀터레스트 같은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중국과 홍콩 90년대의 이미지를 찾아낸 뒤 그 이미지를 재현한 것이다.

서울 용산구 삼각지의 홍콩식 중식당 꺼거.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서울 용산구 삼각지의 홍콩식 중식당 꺼거.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꺼거의 내부.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꺼거의 내부.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효뜨’의 돼지고기덮밥.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효뜨’의 돼지고기덮밥.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오늘날 멋진 가게의 셰프들은 요리인인 동시에 개별 레스토랑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이들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의 맛만큼이나 시각적인 ‘멋 요소’가 중요하다는 걸 본능과 경험으로 안다.

밥 먹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고 말할 정도로 사람이 몰리는 고깃집 ‘몽탄’도 일반적인 구이용 갈비를 특이한 방식으로 정형한 ‘우대갈비’를 만들어 성공했다. 어떤 맛이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진에 찍힐지도 음식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 것이다.

내추럴 와인바 처그.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내추럴 와인바 처그.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 / / / 맛만큼, 멋도 중요

이번 취재를 위해 접촉하고 이야기를 나눈 총 6곳의 업체 대표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35살 이하였고 모두 이곳이 첫 가게가 아니었다. 삼각지역 앞 내추럴 와인바 ‘처그’의 대표는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서 식당 운영 경험이 있다. 꺼거와 효뜨를 만든 남준영 대표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식음료 사업 일을 하다가 한국으로 들어와 사업을 시작했다.

젊고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눈이 삼각지로 쏠린 건 자연스럽다. 삼각지는 입지도 아주 좋다. 지하철 환승역이 있어서 젊은이들이 오기 쉽다. 위치상 서울의 중심이니 구매력이 있는 어른들이 오기도 좋다. 길 건너 효창동에는 대형 아파트단지도 많이 생겨났다. 인근에 국방부와 아모레퍼시픽과 삼일회계법인 등 ‘법인카드’를 쓰는 대형 직장도 꽤 많다. 특히 트렌드에 예민한 젊은 직장인이 많은 아모레퍼시픽 본사 건물이 완공되면서 상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삼각지에 직장을 둔 원민재(30)씨는 “공사만 해도 지도에 표시해두고 간판이 달리면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DM)로 언제 문 여는지 물어봐요. 곧 유명한 가게가 될 거라서요”라고 말했다. 문만 열면 핫플레이스가 되는 셈이다.

간판 없는 와인바 하리.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간판 없는 와인바 하리.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카페 쿼츠.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카페 쿼츠.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이 모든 경향이 농축된 젊은 셰프의 공간이 있다. 용리단길 길 건너 용산소방서 근처의 ‘하리’다. 하리의 정종혁(33) 대표는 프랑스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야니크 알레노에서 일하고 서울 레스케이프호텔의 레스토랑 라망시크레에서 수셰프 경력을 쌓은 뒤 한강대로에 간판도 없는 가게를 만들었다. 이곳도 요즘 가게 성공 공식이 두루 들어 있다. 인스타그램에 잘 어울리는 내외부. 내추럴 와인 등 맛도 있고 트렌디한 술. 파인 다이닝으로 단련된 요리사의 수준 높은 미각이 느껴지는 안주로 무장했다.

하리는 간판조차 없다. 정종혁 대표는 간판 없는 신진 가게라는 대담한 발상을 설명해주었다. “여기가 대로변인데, 간판 없이 빛만 나는 가게가 있으면 사람들이 차로 지나가다가도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말이야 맞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을 젊은 의사결정이었다. 그의 패기는 성공했다. 지금 하리에서 주말에 술을 마시려면 2주 전에 예약해야 한다. 대박이 난 것이다.

하리의 해시브라운.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하리의 해시브라운.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 / / / 이 다음은 무엇일까

“여기가 서울의 마지막 ○리단길이라고도 해요.” 모든 성공에는 그늘이 있다. 하리 길 건너에서 카페 ‘쿼츠’를 운영하는 유연주(35) 대표의 말에서 그걸 느꼈다. 그는 매장 한쪽에서 직접 원두를 볶는다. 농축기를 써서 만든 자체 농축우유를 곁들인 라테를 만들 정도로 커피에 열중한다. 그는 한강대로의 예쁜 건물을 보고 홀린 듯 이 건물에 세 들어 2년 전쯤 쿼츠커피를 열었다. 그동안 삼각지에 온갖 가게가 생기고 부동산 투자사가 끼고 임대료가 폭등했다.

유연주의 고민은 그런 게 아니다. 자신들이 공들여 준비한 커피의 맛에 관심이 없는 손님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어떤 분들은 저희 커피를 마시러 날 잡고 다른 도시에서 오시는데 어떤 손님들은 업로드용으로 한장 찍고 버려요. 그러면 여러 생각이 들죠.” 그의 이야기 안에 뜨는 동네의 뜨는 식당 사장님의 딜레마가 들어 있다. 누군가가 젊음을 걸고 준비한 무엇인가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벼운 여가일 뿐이다. “나에게 계속 묻는 수밖에 없어요. 이다음은 무엇일지, 이 유행이 다 지나도 사람들이 나를 찾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유 대표는 해탈한 듯 말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용리단길은 정말 서울의 마지막 ○리단길이 될까. 이날 만난 젊은 사장들도 트렌드의 초대형 파도에 따라 어딘가로 떠밀릴까. 취재 중엔 권리금이 3개월 만에 5천만원 올랐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니 그럴지도 모른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의 공포.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하다. 이 동네의 젊은 사장님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동네를 존중하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처그의 이명진 매니저는 세련된 공간을 운영하면서도 노포 원대구탕 직원들의 원숙한 가게 운영이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쿼츠의 유연주 대표는 재개발이 되지 않는 한 이 공간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 용리단길의 인기와 다양한 맛의 식당들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여전히 하와이를 꿈꾼다는 권덕 대표가 가게를 접기 전까지는. 

박찬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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