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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집에서 누리는 5성 호텔급 호사

등록 2022-03-18 10:59수정 2022-03-18 11:08

임승수의 레드
잘 키운 피노 누아르의 품격, 이것이 부르주아의 맛
도멘 페블레 꼬르똥 ‘끌로 데 꼬르똥 페블레’ 모노폴 그랑 크뤼. 프랑스 부르고뉴의 좋은 밭 포도로 정성껏 만든 와인과 5성 호텔급 테이크아웃 음식들.
도멘 페블레 꼬르똥 ‘끌로 데 꼬르똥 페블레’ 모노폴 그랑 크뤼. 프랑스 부르고뉴의 좋은 밭 포도로 정성껏 만든 와인과 5성 호텔급 테이크아웃 음식들.

누구네 집 애가 과학고에 진학했다더라, 영어로 된 책을 술술 읽는다더라, 같은 게 부러웠던 적은 없다. 쪽지 시험에서 절반 가까이 틀렸다며 해맑게 웃는 두 초등학생의 아빠인 주제에 말이다. 이런 나도 몹시 부러움을 느낄 때가 있는데, 타인의 혓바닥이 5성 호텔급 호사를 누리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이다. 맛집이나 음식 관련 정보를 검색하다 보면, 차림새만으로도 맛있음 확정인 유명 레스토랑 음식에다가 라벨 당당한 고급 와인 사진까지 떡하니 올려놓은 블로그 게시물을 종종 만난다. 그때마다 마음 상한 혓바닥이 나를 타박하니 주인으로서 미안할 따름이다.

이 씁쓸한 박탈감을 달래기 위해 가끔씩 찾아가는 곳이 있다. 여의도 더현대서울의 ‘구르메 에오’다. 이탈리아 음식점 ‘리스토란테 에오’의 스타 요리사 어윤권씨가 운영하는 테이크아웃 매장인데, 완전하게 조리된 음식을 포장해 집에서 간편하게 전자레인지로 데워 먹는 방식이다. 이곳 음식을 처음 맛보고 식재료의 퀄리티와 음식의 완성도에 온 가족이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수준의 음식을 고급 호텔에서 즐기려면 훨씬 비쌀 텐데, 구르메 에오에서는 대체로 한 팩에 1만원대 수준으로 다양한 요리를 판매하고 있었다.

그날도 무슨 이유로 인해 미각의 계급적 격차를 느꼈던 게 분명하다. 갑자기 5성 호텔급 음식이 격렬하게 떠올랐으니까. 마음은 굴뚝같지만 형편은 안 따라주니,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더현대서울의 구르메 에오를 방문했다. 진열된 요리 중에서 고심 끝에 시금치를 곁들인 관자구이, 가지 밀푀유, 소고기 미트볼, 버섯 라구 리소토 이렇게 네가지를 구입했는데 전부 합쳐서 5만6천원이 들었다.

여윳돈 있을 때 사서 셀러에 보관 중이던 좋은 와인을 꺼냈다. 도멘 페블레 꼬르똥 ‘끌로 데 꼬르똥 페블레’ 모노폴 그랑 크뤼.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의 암호문 같다고? 정말 그러하구나. 프랑스 부르고뉴의 좋은 밭 포도로 정성껏 만든 와인이라는데, 호텔에서 주문했다면 어마어마한 청구서가 손에 쥐어졌겠지. 다행히 해외직구로 상당히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했다.

한잔 들이켜니, 와인 참 기똥차구나. 맛이 시시각각 변하네. 시큼한 흙 향과 버섯 향, 붉은 과실 향이 갈수록 살집이 붙으며 해돋이 태양처럼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와인은 천천히 즐겨야 하는데 너무 맛있으니 그게 어디 맘대로 되나. 구르메 에오의 음식은 확실히 와인과 더불어 즐겨야 제격이다. 이탈리아 본토 음식은 대체로 와인과 곁들인다는 가정하에 조리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웬만하면 파전에 막걸리, 닭똥집에 소주를 곁들이는 것과 같겠지. 네 요리 모두 인상적이었지만 처음 먹어보는 가지 밀푀유는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 묘한 질감이 기억에 남는다.

살다 보면 세상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기도 한다. 선거 결과가 못마땅할 수도 있고, 쓰고 있는 책 원고가 안 풀려 머리를 쥐어뜯게 되고,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불쑥 찾아온 코로나에 맥 빠지기도 한다. 그럴 때는 미친 척하고 형편에 과분한 부르주아 음식을 섭취하는 만용이 삶에 활력을 주기도 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처럼 말이다.

글·사진 임승수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저자 reltih@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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