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트2호점의 서양식 멸치회.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4월의 남해. 봄 바다는 눈부셨다. 반짝거리는 바다 한가운데 나무로 지은 요새 같은 것이 듬성듬성 떠 있었다. 통통배를 타고 빛나는 바다를 가로질러 요새에 도착하니 정말 옛 성 느낌처럼 위로 열리는 문이 있었다. 내부는 마치 커다란 정원 속 연못 같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게 바로 대나무로 만든 죽방이었다.
현재는 이 죽방 어업이 남해와 삼천포 일부 지역에만 남아 있다. 물이 많을 때 죽방 근처를 헤엄치던 생선들이 물이 빠진 후 그 안에 갇히면 잡아 올리는 원리다. 막상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수심이 얕았다. 물속엔 멸치뿐 아니라 갑오징어, 게 등 정말 다양한 어류가 있었다. 커다란 체험 수족관에 온 것 같기도 하고, 바로 눈앞에 살아 헤엄치는 먹거리들이 널려 있는 무제한 해산물 뷔페에 온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죽방 안의 멸치들은 언뜻 보면 청어처럼 커다랗고 파랬다.(실제로 멸치는 크기가 2~3㎝밖에 안 되는 지리멸, 세멸부터 15~18㎝의 대멸까지 크기가 다양하다. 청어도 사실은 큰 멸치다. 의외로 제주도 멜젓에 사용되는 꽃멸은 멸치가 아니다.)
이 죽방에서 잡혀 가공된 죽방멸치의 경우 1㎏에 백만원대까지 가격이 나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물로 잡은 멸치처럼 표면이 상할 일이 없어 매끈하고 반짝이는 외모가 돋보이는 죽방멸치. 희소가치와 제품의 질이 빚어낸 특별한 가격이다. 그나마도 없어서 못 판다고 현장의 어부들은 자랑스럽게 말하면서도 내게만 저렴하게 주겠다고 살짝 귀띔했다. 하마터면 정말 살 뻔했다. 휴우…. 해마다 4월이면 떠오르는 즐거운 추억이다.
기억하자. 다가오는 4월은 멸치의 계절이다. 멸치는 사계절 잡히지만 특히 4월의 멸치가 맛있다. 이맘때면 늘 기장에서 멸치 그물을 터는 장면이 텔레비전에 나오곤 하는데, 기장뿐만이 아니다. 남해와 서해를 중심으로 잡히는 멸치는 지역별로 약간의 크기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맛있다.
멸치 이름에는 슬픈 사연이 있는데,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생선이 성질도 급해서 잡으면 바로 죽어버린다고 멸할 ‘멸’(滅) 자를 써서 멸치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이름과 달리 영양이나 맛이나 뭐 하나 밀리지 않는 게 또 멸치다. 칼슘의 왕이란 별명은 아무 생선한테나 붙일 수 없다. 멸치는 작은 몸집 덕분에 뼈째 섭취가 가능해서 중요한 칼슘 공급원인데다 칼슘 흡수를 위한 필수 요소인 다양한 비타민과 좋은 생선 지방까지 고루 갖추고 있다. 어렸을 때 누구나 들어봤을 그 소리 “멸치볶음 꼭 먹어”란 말도 이 때문이다. 멸치볶음이 국민 반찬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안정적인 멸치 어획량과 1960~70년대 정제 설탕의 유행 시기가 잘 맞물렸던 이유도 있다. 설탕의 대중화 이전에 멸치는 국물을 우리거나 액젓을 만드는 용도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
안주마을의 한국식 멸치회무침.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멸치의 계절이 되면 내가 운영하는 식당 주방은 하루하루가 비상 대기 태세다. 아침 경매에 횟감용 대멸치가 떴다고 연락이 오면 바로 매수에 들어간다. 한 박스만 받아도 멸치가 몇백마리. 이걸 일일이 손톱으로 비늘을 긁고 지느러미를 떼고 가운데 통뼈를 제거해 횟감으로 손질한다. 레몬즙과 소금을 충분히 뿌리고 올리브오일과 로즈메리, 타임 등 허브를 넣고 켜켜이 쌓아 멸치절임을 만든다. 이게 서양에서 ‘안초비’라고 하는 절임 멸치, 절임 정어리를 만드는 방식이다. 이 상태로 냉동 혹은 냉장해서 며칠 정도 보관이 가능하다. 레몬즙과 소금으로 차진 식감을 만들고 올리브오일과 허브의 향까지 더한 서양식 멸치회는 행여 비리지 않을까 걱정하던 사람들마저 눈이 휘둥그레지는, 놀라운 고소한 맛을 선사한다. 4월 멸치가 가진 매끄러운 지방의 맛은 입술에서부터 시작된다. 촉촉하게 착 달라붙었다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멸치의 그 맛은 많은 사람들에게 봄을 기다리게 한다.
사실 가장 익숙한 방법은 초고추장에 멸치를 버무려 먹는 것일 테다. 의외로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 간장, 식초를 섞은 마늘간장양념에 버무려 먹는 간장 무침 멸치회도 맛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멸치회는 기름장에 찍어 먹는 것이다. 이렇게 기름장에 멸치회를 먹을 때 마늘종을 같이 곁들이면 사각사각 씹히는 식감까지 보완해줘서 좋다.
봄 멸치는 무조건 회로 먹어야 한다. 늘 먹던 쪄서 말린 멸치 말고 봄에는 생멸치를 즐겨보자. 이것이 진짜 봄의 맛이다.
홍신애 요리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