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브랜드 잡지들. 스튜디오 어댑터 윤동길 실장
지금까지는 기업에서 홍보를 목적으로 발행하는 무료 ‘사외보’와 ‘브랜드 매거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다. 이젠 달라지고 있다. 잡지가 특정 브랜드 하나를 선택해 한권 통째로 역사와 전통을 설명하거나, 잡지 스스로 브랜드가 되어 제품을 생산·판매하기도 한다. 창간 64년이 된 사외보의 ‘시조새’부터 엠제트(MZ)세대가 즐겨 보는 주거문화 전문지까지, 브랜드의 가치와 철학을 전하는 종이잡지들을 소개한다.
<향장> 1974년 2월호. 아모레퍼시픽 제공
<설화수> 매거진(왼쪽), <향장> 최근호. 아모레퍼시픽 제공
‘아모레 아줌마’의 화장품 향기와 함께 떠오르는 추억의 미용 잡지, <향장>이 아직도 발행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놀라는 이들이 많다. 게다가 표지모델이 ‘무려’ 블랙핑크의 제니라고 하면 더 크게 놀란다. 아모레퍼시픽이 펴내는 이 잡지는 지난 2010년 통권 500호를 맞이했고 2018년 600호를 넘어 이제 700호를 향해 가는 ‘최장수 브랜드 잡지’가 되었다.
<향장>의 전신은 <화장계>로, 1958년 8월1일 창간되었다.(당시 태평양화학) ‘얼굴형에 맞는 헤어스타일, 산과 바다에 걸맞은 화장법, 스타가 사용하는 화장법’ 같은 다양한 미용 정보와 제품 설명이 뼈대를 이뤘지만 앙드레 김 패션쇼를 지상 중계하거나 시·소설·에세이 등 여성들의 문예작품도 함께 선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전국 ‘아모레 카운슬러’를 통해 무료로 배포되는 이 방문판매용 월간지는 한때 200만부 넘게 인쇄되었고 과월호가 돈을 받고 팔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2010년 월평균 100만부, 2019년엔 50만부, 최근엔 21만부로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엄청난 발행 부수를 자랑한다. 1999년부터는 인터넷으로도 만날 수 있다.
창간호 표지모델은 영화 <청춘 쌍곡선>(1956), <순애보>(1957) 등에 출연한 최정상의 인기 배우 이빈화였다. 1950~60년대엔 김지미, 엄앵란이 표지모델로 활동했고 남성 스타 최무룡과 김진규도 표지를 장식했다. <향장>으로 제호를 바꾼 건 1972년. 이후 표지 모델로는 배우 임예진·금보라·황신혜, 미스코리아 장윤정, 배우 김지호·이승연·전지현 등이 활약했다. 김태희는 2000년 <향장>의 모델로 연예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송혜교와 가수 제니가 표지모델로 활약 중이다.
아모레퍼시픽은 ‘사보계의 샤넬’로도 일컬어지는 브랜드 잡지 <설화수>를 2003년부터 발행해오고 있다. 해당 브랜드 브이아이피(VIP) 고객 및 해외 고객을 대상으로,
19년 동안 이어온 이 잡지는 브랜드 철학에 맞닿은 문화 교양서의 성격을 띤다. 설화수 브랜드 자체가 전통문화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뷰티, 음악, 미술, 문화 등 다양한 정보를 망라한 것은 물론, 한국 전통의 미감과 지혜를 담은 전통 공예품, 젊은 공예 작가들을 발굴하고 소개한 점이 돋보인다.
남성 브랜드 시리즈가 연 2회 발행하는 <시리즈> 매거진. 코오롱에프엔시(FnC) 제공
코오롱에프엔시(FnC)의 남성 브랜드 시리즈가 연 2회 발행하는 <시리즈> 매거진도 자리를 탄탄히 잡았다. 2006년 창간한 이 잡지는 시즌마다 하나의 열쇳말을 선정하고 테마에 맞는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담아내는 것이 특징. 지금까지 다룬 주제는 ‘빈티지, 아침밥, 나의 정원, 마켓, 수선’ 등으로 아날로그 감성,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브랜드의 철학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섬세한 주제 접근과 고급스러운 편집 덕에 서점 매대에서 다른 패션·리빙지와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몇 안 되는 브랜드 잡지이기도 하다. 최근호(2022년 봄·여름, 31호) 주제는 ‘숙, 박’. 코로나19의 유행으로 ‘잠잘 숙’(宿) ‘머무를 박’(泊)이란 의미가 재구성되었다고 보고 건축가가 지은 펜션, 제주 캠핑 숙소, 명상과 사색을 할 수 있는 공간 등을 소개했다.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가 사회공헌 활동의 하나로 발행하는 <뮤>(MiU)도 주목할 만하다. 2013년 12월 첫호가 나온 <뮤>는 하이테크를 최우선 가치로 표방하며 모빌리티 산업의 신기술과 첨단 트렌드를 다룬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비행기, 요트 같은 과학기술로 경쟁의 속도를 끌어올린 것에 관한 이야기를 실어 ‘스피드 덕후’의 눈길을 끈다. 카페, 은행, 골프장, 리조트, 자동차 서비스센터 등에서 만나볼 수 있다.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가 사회공헌 활동의 하나로 발행하는 <뮤>(MiU).
젊은 세대의 주거문화를 다룬 <디렉토리> 매거진. 종이잡지클럽에서 인기가 높다. 이유진 기자
매거진 <아침>(Achim). 스튜디오 어댑터 윤동길 실장
전통적인 브랜드 잡지와 달리 좀 더 젊고 신선한 시도를 하는 매체도 있다. 2015년 창간한 계간지 <아침>(Achim)은 신문 사이즈와 비슷한 커다란 종이 한장을 여러 섹션으로 나눠 콘텐츠를 실었다. 사외보 성격의 브랜드 매거진이 해당 제품 홍보에 집중해 발간된다면, 이 매거진은 거꾸로 종이잡지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 제품을 만들고 판매한다. 자사에서 직접 운영하는 온드미디어(have-achim.com)를 통해 잡지는 물론이고 수제 비건 그래놀라, 패브릭 포스터, 신진 작가의 도예작품, 캘린더, 시리얼북 등을 만나볼 수 있는데, 상당수가 매진이다.
잡지는 아침(morning)을 바탕으로 매호 다른 주제를 다루며, 주제를 설명하는 ‘비기닝 레터’와 아침 관련 인터뷰와 에세이, 유머를 담아 쓴 ‘시리얼 리뷰’와 레시피, 아침에 읽으면 좋은 콘텐츠로 구성했다. 윤진 대표는 “매호 1000부가량 발행하며, 잡지라기보다 한장의 포스터로 인식하는 분들도 있지만 굳이 규정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나온 20호 가운데 가장 인기를 끈 건 17호 ‘요가’편. 인플루언서인 요가소년을 인터뷰해서 실었다.
부동산중개플랫폼 직방과 미디어브랜드 ‘볼드저널’이 함께 만드는 <디렉토리>는 2019년 1월 창간되었다. 원룸, 투룸, 오피스텔, 빌라, 소형아파트 등에 거주하는 1~2인 가구의 라이프스타일을 다루는 이 잡지는 주거 지역, 집 구조, 면적, 가격을 소개하고 거주자 인터뷰로 타인의 삶과 주거 형태를 보여준다. 집을 ‘부동산’이 아니라 ‘주거’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타인의 교류나 새로운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최근호 주제는 ‘나의 재택 표류기’. 산업화의 결과로 생긴 집과 일터의 공간적 분리가 다시 통합으로 바뀌어가는 과정, 근로 형태의 변화가 초래할 가치관의 변화를 전망한다. 잡지전문공간 종이잡지클럽 정가영 매니저는 “책을 좋아하면서도 주거와 집 꾸밈에 관심이 많은 젊은 이용자들이 가장 즐겨 보는 잡지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directorymagazine.kr)
종이잡지클럽 합정 내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유니클로 <라이프웨어 매거진>. 유니클로 제공
글로벌한 영향력을 갖고 자기 정체성을 구축한 브랜드를 한 호에 하나씩 통째로 소개하는 잡지, ‘매거진 <비>(B)’는 ‘브랜드’와 ‘밸런스’의 앞글자를 땄다. 광고 하나 없이 균형 잡힌 레이아웃, 뚜렷한 메시지를 보여주는 이 잡지는 네이버 최연소 임원 출신으로 최근 카카오 공동대표직을 내려놓은 크리에이티브디렉터 조수용 발행인이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2011년 11월 창간호에서는 프라이탁을 다뤘고 그 뒤 뉴발란스, 라미, 러쉬, 스타우브, 레이밴, 화요, 펭귄북스, 이솝, 구글, 하겐다즈, 넷플릭스, 인스타그램, 샤넬, 몽블랑 등 세계 유수의 브랜드를 검토했다. 매거진<비>와 배달의민족이 함께 만드는 ‘푸드 다큐멘터리 매거진’ <에프>(F)도 있다. 이 잡지는 인류의 식문화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식재료와 음식 이야기를 소개한다. 2021년 12월호 ‘위스키’ 편에는 배민 창업자 김봉진 의장과 조수용 발행인이 대담을 했다.
유니클로가 펴내는 <라이프웨어 매거진>은 일년에 두번 발간된다. 이 잡지는 세련되고 트렌디한 감각을 가진 도시 남성의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한) 패션, ‘시티 보이’ 스타일을 유행시킨 일본 패션 잡지 <뽀빠이>의 전 편집장인 기노시타 다카히로가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합류한 것으로 유명하다. 2022 봄·여름 시즌 매거진 주제는 ‘옷을 입는 즐거움’으로, 1930년대 미국에서 시작한 요리책 <조이 오브 쿠킹>에서 영감을 얻었다. 뉴욕의 미술가, 음악가 등 도시민들의 인터뷰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 <마리 앙투아네트>(2006)를 만든 영화감독 소피아 코폴라의 일상 인터뷰도 함께 실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