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전다실’의 박재형 대표가 중국의 찻주전자인 자사호에 물을 붓고 있다.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애초 사업을 접으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2~3년 전부터 젊은층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차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신기했다.”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통인동 호전다실의 박재형(43) 대표가 능숙한 솜씨로 차를 내리면서 말했다.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거래처 사장님이 권해준 차를 마시고 차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 박 대표는 2012년부터 차를 직접 수입·유통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호전다실은 그가 운영하는 차 시음장이다.
박 대표가 폐업을 고민할 정도로 한동안 차 시장은 좋지 않았다. 2000년대 초 한국에 갑자기 보이차 열풍이 불어닥친 적이 있었다. 보이차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가 창간되고 회사 안에 보이차 동호회가 생겨날 정도였다. 하지만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와인처럼 반짝인기였다. 박 대표는 “차 애호가들이 늘어나자 품질 좋은 보이차 가격이 급등했다. 가격이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싸지니 젊은층이 외면했다. 시장에 신규 유입이 안 된 것이다. 노년층의 취미로 인식되면서 인기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차의 인기는 그렇게 사그라지는 거 같았다. 하지만 뜻밖의 부활은 ‘셀럽’을 통해 시작됐다. 대표 주자가 가수 이효리다. “이효리가 <효리네 민박>에서 보이차를 마시는 장면이 나왔다. 시청자들이 보기에 그 장면이 너무 예쁘고 신기했던 것 같다. 이효리뿐만 아니고 다른 셀럽들이 보이차를 마시는 장면이 자주 화면에 노출됐다. 그때부터 시장에서 반응이 왔다.” 박 대표의 말이다.
‘무심헌’의 김인웅 공동대표가 차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정국 기자
군불을 때던 차의 인기는 코로나19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급기야 폭발 지경에 이르렀다. 집콕으로 인한 홈카페 만들기가 사회현상이 되자, 차 시장 자체가 엄청나게 확장된 것이다. 차 자체뿐만 아니라 특히 차를 내리고 마실 때 쓰는 다구의 인기도 급상승했다. 온라인 상거래업체인 옥션에 따르면 코로나 창궐 이듬해인 2021년 1분기 차 거름망의 판매가 전년 같은 기간에 견줘 두배 이상(143%), 찻잔의 판매가 열배 이상(1410%) 늘었다. 옥션 관계자는 “집콕 라이프스타일로 인해 자리잡은 홈카페 문화가 매출 상승의 원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 차에 빠진 사람들은 다구에 관심이 높다. 공예품의 가치도 있는데다가, 특히 보이차를 마시는 방법인 ‘공부차’의 화려한 퍼포먼스에 매료되는 사람이 많다. 공부차는 일종의 중국식 다도다. 공부차에서 쓰는 다구는 일반적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쓰는 다구보다 작고 앙증맞아 눈길을 확 끈다. 소꿉놀이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런 작은 깨알 아이템이 수집의 대상이 되고, 차 시장 전체를 키우는 상황이다.
엠제트(MZ) 세대를 중심으로 한 ‘스몰 럭셔리’ 현상도 차 인기를 확산시키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대를 이어 차를 판매해오고 있는 서울 용산구 무심헌의 김인웅(39) 공동대표는 “최근 차의 인기는 일종의 풍선 효과다. 와인과 위스키로 이어진 인기가 이제는 차로 오고 있는 것”이라며 “디테일한 맛을 구분하는 재미가 차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와인과 위스키보다 진입 장벽이 낮다. 20대에게 이색 데이트 코스로도 차 테이스팅이 인기다”라고 말했다. 무심헌에서도 차 테이스팅 코스를 운영 중인데, 1인당 2만원으로 한시간 동안 두 종류의 차를 시음할 수 있다. 스페셜티 커피 한잔에 1만원 이상 하는 상황에서 나쁘지 않은 가격대다.
복잡한 차의 분류도 매력 포인트다. 차는 찻잎의 산화 정도에 따라 녹차-백차-황차-청차-홍차-흑차 순으로 구분한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우롱차는 청차, 보이차는 흑차다. 이 산화 단계 안에서 원산지와 찻잎 등급, 가공 방식, 후발효 여부 등으로 또 나뉜다. 우리가 흔히 보이차를 마신다고 하지만, 실제론 시음장에 가면 6단계의 차를 골고루 맛보게 해준다. 손님들은 그때서야 보이차가 차의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깊게 파면 팔수록 어려워지는 게 차다. 업계에선 “와인이 장기라면 차는 바둑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한다. 이런 매력이 더욱 소비층을 자극하고 있는 것.
내추럴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월하보이 내부. 이정국 기자
차를 마시는 연령이 내려가고, 저변이 확대되자 이른바 ‘힙한’ 가게들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이미 서울 북촌의 델픽, 한남동의 산수화티하우스는 인스타그램에서 ‘좋아요’를 많이 받는 힙플레이스다. 그 가운데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내추럴보이’와, 서울 북촌마을의 ‘월하보이’는 이색적인 콘셉트로 관심을 받고 있다.
내추럴보이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내추럴와인과 보이차를 함께 파는 매장이다. 현재 시장에서 가장 핫한 음식의 만남이랄까. 정구현(38) 대표는 차가 막 뜨기 시작했던 2019년에 이곳을 열었다. 왜 내추럴와인과 보이차일까. 그는 ‘발효’라는 접점을 얘기했다. “내추럴와인은 효모의 느낌이 살아 있는 발효의 맛이 매력이다. 보이차도 비슷하다. 둘 다 발효의 맛을 느낄 수 있어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정 대표는 말했다. 와인의 산지와 기후 등 자연환경을 구분하는 테루아르도 보이차에 똑같이 적용된다. 또 와인을 마신 뒤 보이차를 마시면 와인의 여운을 해치지 않으면서 숙취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 여러모로 와인과 보이차는 찰떡궁합인 셈.
북촌의 월하보이는 주은재 대표가 운영하는 티하우스다. 이곳은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이른바 사진이 잘 나오는 ‘사진발 명소’로도 유명하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우아” 소리가 나올 정도로 개성 있다. 100년 넘은 축대를 그대로 살린 내부와 갖가지 차 소품들이 눈길을 끈다. 월하보이는 ‘달빛 아래서 보이차를 마신다’는 뜻이라고.
주 대표의 세심한 설명도 손님을 끄는 인기 요인이다. 인사동에서 사업을 한 부모님 덕분에 어릴 때부터 차를 접하게 됐다는 주 대표는 하루에 차를 3ℓ 이상 마실 정도로 엄청난 차 마니아다. 그는 “30~40대 여성 고객이 주로 많이 찾는데 최근 20대 손님도 많이 늘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차의 매력이다.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쉼을 주는 역할도 한다”고 말했다.
‘내추럴보이’의 정구현 대표가 보이차를 설명하고 있다. 이정국 기자
차에 입문하기 위해선 일단 구매를 해야 하지만, 무턱대고 제품을 사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종류도 다양한데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처음 접근할 땐 대용량을 사기보다는 소포장 제품을 사는 게 좋다. 다양한 시음도 필수다. 무심헌 김인웅 대표는 “요즘 차를 판매하는 곳에선 대부분 소분한 제품을 판다. 가격 부담이 없으니 다양하게 마셔보고 자신에게 맞는 제품을 고르는 게 좋다. 처음부터 비싼 제품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시음장도 여러곳 다녀보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특히 보이차의 경우 과거 잔류 농약 문제나 가짜 논란도 많았다. 차 업계에선 뼈아픈 부분인데 최근 많이 개선됐다. 생산 연도나 생산 지역을 속인 경우가 더러 있었고, 농약 문제는 제대로 된 검역을 거치지 않고 수입됐기 때문에 발생했다. 하지만 최근 정식 통관 절차를 거쳐 수입하는 제품은 적어도 최소한의 안전성은 보장할 수 있다. 호전다실 박재형 대표는 “정식 수입 제품이라는 걸 알려주는 식품위생법상 한글표시사항이 있는 제품을 사는 게 좋다. 오랫동안 영업해온 가게를 정해두고 사는 것도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가격대는 어느 정도가 좋을까. 만나본 전문가들은 보이 숙차(속성 발효) 기준 1병(357g)에 10만원대가 가장 무난하다고 말했다. 생차(자연 발효)는 가격대가 조금 더 올라간다. 얼핏 보면 비싸 보이지만 차 1회분 용량이 3g인 걸 고려하면 100번을 훨씬 더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일반 커피전문점의 커피 100잔 가격과 비교해도 훨씬 싸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