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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돈 다 털어, 세계일주” 부모님 설득에만 두 달 필요했다 [ESC]

등록 2022-05-27 05:00수정 2022-05-27 10:46

그걸 왜 해? : 세계일주 🚋 🧭 🚢 🚲
칠레에서 트레킹 중 텐트를 말리려고 뛰어다니고 있는 필자. 일상과는 전혀 다른 자유가 여행에 있다. 사진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칠레에서 트레킹 중 텐트를 말리려고 뛰어다니고 있는 필자. 일상과는 전혀 다른 자유가 여행에 있다. 사진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파도 하나 없는 편서풍지대를 미끄러지듯이
가로지르는 범선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석달 준비,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중학교 때쯤 ‘대항해시대’라는 게임이 있었다. 아테네에서 미술품을 사서 이스탄불에 팔고, 이스탄불의 융단을 사서 다시 아테네에 판다. 돈이 많이 모이면, 배에 가득 물과 식량을 채워서 모험을 떠난다. 희망봉을 돌아, 인도를 거쳐 황금의 땅 ‘지팡그’를 찾아 나선다. 저 멀리 바다 건너의 땅엔 무엇이 있을까? 어떤 사람들이 살까? 무엇을 먹을까? ‘내 발로 지구를 한바퀴 돌아보는 것―세계일주.’

사실 이건 취미라기보다는 꿈같은 이야기다. 전염병이 세계를 강타한 지금 느끼기엔 더 그렇다. 아직까지는 나라마다 방역 상황이 다르고 코로나19 검사와 격리 조치로 발목이 잡힐 수도 있다. 하지만 드디어, 세계일주는커녕 해외여행조차 꿈꾸지 못했던 팬데믹의 시절이 끝나가는 듯하다.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고, 계절을 넘나들며 온갖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만나는 그런 여행을 다시 꿈꿔보자. 그 비현실적인 삶을 한때 살아본 사람으로서, 세계일주 여행자로서의 경험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나’라는 빈 그릇을 채우러…

나는 2006년, 1년간의 세계일주를 떠났다. 1년간의 여행을 준비하는 데 얼마 정도의 시간이 들까? 3년이 넘게 걸리는 사람이 있고, 한달 만에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석달 정도 준비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중 두달은 부모님을 설득하는 시간이었다.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는 말도 있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도 있지만, 장기 여행은 떠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용기만큼, 가족들에게도 용기가 필요한 결정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다녀본 중에 어디가 가장 좋았어?’라고 물으면 항상 첫번째로 대답하는 카라코람 하이웨이. 중국과 파키스탄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로 해발 4300m 높이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다. 사진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누군가‘다녀본 중에 어디가 가장 좋았어?’라고 물으면 항상 첫번째로 대답하는 카라코람 하이웨이. 중국과 파키스탄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로 해발 4300m 높이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다. 사진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갖고 있던 돈을 모두 털어서 신세지지 않고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부모님을 학교 빈 강의실에 모셔놓고 약 30분 동안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왜 내가 가야 하며, 어떤 것을 이루겠다, 같은 이야기. 어렴풋이 생각나는 건 빈 그릇 사진을 화면에 띄워놓고 “‘나’라는 빈 그릇을 채워 오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외쳤던 것 같은데, 어이가 없으셨는지, 아버지는 일주일 정도는 나와 대화를 하지 않았다.

나의 프레젠테이션이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경험자로서 먼 길 떠나려는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를 설득할 수 있는 몇 가지 팩트를 제시한다. ① 영어 실력이 는다. 지금은 하도 오래 안 써서 영어 대화가 거의 들리지도 않지만, 여행을 오래 하면 박찬호 선수의 다저스 시절처럼 한국말이 서툴러지고 영어가 편해지는 신기한 상황이 발생한다. 이유는 바로 외로움 때문이다. 중동이나 남미처럼 한국인이 잘 가지 않는 여행지를 다니다 보면, 한달 넘게 한국 사람을 못 만나는 경우도 간혹 생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어쨌든 대화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데, 게스트하우스를 다니다 보면 당신만큼 대화가 절실한 누군가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추천하는 국적은 프랑스나 독일, 동남아 쪽 친구들. 우선은 서로 영어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부끄러울 일이 없고, 서로 쉬운 단어를 쓰기 때문에 대화가 잘 통한다. 일본 친구들은 워낙에 많기 때문에 끼리끼리 뭉치는 성향이 있고, 모국어가 영어인 친구들하고 놀다 보면 던지는 농담을 이해 못해서 금방 외로워질 수 있다. 아무튼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영어가 는다.

② 언젠가 취업을 준비한다면 자기소개서가 풍성해진다. “실크로드를 따라 걸으며 글로벌 비즈니스의 근간을 깨달았으며 히말라야 베이스캠프에서 도전정신을 무한히 높여 보았습니다.” 대략 이런 식.

③ 몸이 굉장히 건강해진다. 80리터짜리 배낭이 20㎏ 정도 나갈 텐데, 이걸 1년간 메고 걷는다면 근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나의 경우 여행 후반부에 마추픽추 트레킹을 했는데 짐꾼으로 일하는 분들과 농담 따먹기 하면서 뛰어다녔던 게 생각난다.

갈 수 있으면 어떻게든 가시라

그래서 결론이 뭐냐면, 갈 수 있으면 어떻게든 가보라는 거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현재 직장에 다닌다거나, 가정이 있는 분들에게 세계일주를 계획하라고 추천하는 짓을 나는 못 하겠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다녀오기엔 책임져야 할 것도, 넘어야 할 산도 너무 많으니까. 그래서 이번 편을 읽어주었으면 하는 대상은 대학생이나 미래를 탐색하는 중인 20대들이다. 딱 이맘때였다. 2006년 늦봄이었나 초여름이었나, 학교 옥상에서 밑을 내려보면서 인생이 좀 답답하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들과 대화 중에 대항해시대 게임 이야기가 나왔고, 게임 배경음악인 ‘마스트 인 더 미스트’(Mast in the Mist)를 들었다. 파도 하나 없는 편서풍지대를 미끄러지듯이 가로지르는 범선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때부터 준비해서 3개월.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실크로드를 따라 스페인까지 간 다음 남미로 넘어가 남극에 맞닿아 있는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에서 이대로 계속 여행하다 보면 한국 못 돌아가겠다 싶어서 돌아왔다.

중국 둔황의 사막. 여행도 삶의 연장선이기 때문에 명과 암이 있다. 사진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중국 둔황의 사막. 여행도 삶의 연장선이기 때문에 명과 암이 있다. 사진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여행을 다녀와서 사람이 바뀌었냐면 그렇지는 않고, 아버지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나라는 그릇이 찰랑찰랑 채워졌냐면 사람은 바뀌는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을 뿐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그때 그 노래를 다시 듣고, 당시를 추억하다 보니, 여전히 당시 나의 결정이 맞지 않았나 싶다. 언젠가 아이들이 더 크면 같이, 아이들과 사이가 틀어져서 더 이상 같이 놀아주지 않는다면 아내와 둘이서. 파타고니아 어느 산속에 묻어둔 와인을 찾아 마시러 다시 돌아가고 싶다.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절, 가장 대단한 모험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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