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광고를 만드는 사람이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 가끔 수다를 떨다 보면 ‘언젠가 한번 꼭 만들어보고 싶은 광고가 뭐냐’는 질문이 꼭 나온다. 많은 광고인들이 꼽는 건 위스키 광고. 이런 상황이 바로 설정된다.
아들 : (아버지에게 선물한 술을 한잔 따르고) 아버지, 술맛이 어때요?
아버지 : 너도 아들에게 위스키를 선물 받으면 알게 될 거다”
또 다른 광고는 자동차. 아무도 달리지 않은 길을 끝없이 달리는 아름답고 스펙터클한 광고를 꿈꾼다. 얼마 전 우리 회사 다른 팀에서 재미있는 에스유브이(SUV:스포츠실용차) 광고가 나왔다. “테일게이트 파티”(Talegate party)라는 멋진 말이 핵심 카피였다. 자동차를 달리는 능력으로 광고하지 않고, 자동차의 뒷문을 열어 2열 의자를 다 눕힌 다음 그 안에서 풍경을 즐기는 내용이었다. 이 카피가 신선했던 이유가 있다. 나도 10년 넘게 자동차 광고를 기획했는데 항상 ‘이번엔 또 어디를 달리나’를 고민한다. 저번에 옆 팀에선 숲속을 달렸고 강가는 얼마 전 경쟁 브랜드에서 달렸다. 어디 안 달려본 데 없나 생각하다 ‘남극’을 떠올렸는데, 그것도 몇년 전에 아는 선배가 달려버렸다. 우리의 고민은 항상 언젠가, 누군가, 반드시, 그 길을 지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전긍긍. 도대체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과 고민. 그 고통을 참다못한 누군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차라리 안 달리면 안 돼요? 제발!” 처음엔 웃어넘겼지만,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했으리라. “그래. 신선하긴 한데…차가 달리지 않으면 뭘 해야 해?” “차박이요!” 그 지난한 과정의 끝에 옆 제작팀은 편안한 일상을 얻어내게 됐고 나도 글감 하나를 얻었다.
차박은 말 그대로 차에서 먹고 자는 거다. 세단으로도 가능하다고는 하는데, 실제로 도전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에스유브이의 경우는 웬만하면 다 할 수 있다. 큰 에스유브이는 2열과 트렁크 공간을 접으면 큰 돗자리 하나 정도의 공간이 나오고, 소형 에스유브이도 앞 좌석까지 접으면 작은 돗자리 하나 정도의 공간이 나온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쾌적하게 즐기려면 어른 두명, 가족이라면 어른 둘에 어린이 한명 정도가 적당하다. 나는 아주 작은 1인용 텐트 하나를 차에 비치해뒀다. 아내와 아이 둘은 차에서 자고 나는 밖에서 자는 경우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차박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텐트를 치면 되는데 굳이 차에서? 캠핑과 뭐가 다르기에 굳이 차에서 자는 거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차박과 캠핑은 조금 다른 재미를 준다.
한국에서 캠핑을 하려면 우선 ‘예약’부터 시작해야 한다. 요즘 상황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캠핑장 잡기는 어렵고 특히 풍광이 좋은 ‘뷰 맛집 사이트’는 굉장히 오래전에 예약해야 한다. 여기서 차박과 캠핑의 큰 차이가 생긴다. 캠핑은 주로 만들어진 캠핑장에서 하루를 보내는 반면, 차박은 차량이 진입 가능한 모든 곳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예를 들면 태백산 꼭대기에서 태백산 줄기를 바라보며 하룻밤을 보낼 수 있고, 동해 백사장 한가운데에서, 홍천의 강가에서도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캠핑장이었으면 이런 뷰에서 하루를 지내기 위해선 예약이 가능한지 혹시 예약이 취소된 건은 없는지 족히 일주일은 신경을 써야 하는 수준의 캠핑 사이트들이, 차박의 경우엔 차만 있다면 훌쩍 떠나서 하루 즐기다 올 수 있는 곳이 된다. 캠핑장이 아니라 자연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차박이 캠핑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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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장점은 짐이 적다는 것이다. 캠핑에서 가장 큰 짐이 되는 것은 텐트인데, 차박에선 텐트와 그에 관련된 짐들이 사라지다 보니, 짐 자체가 적어서 상대적으로 간편한 느낌을 준다. 캠핑에 입문하는 초보 캠퍼들이 힘들어 하는 것이 텐트와 타프(볕과 비를 막으려 텐트 입구에 치는 천막) 치는 노동의 강도이다. 1박2일 캠핑을 다녀오면 하루 만에 집을 지었다가 다시 허물어야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선 이게 은근히 힘든 일이다. 반대로 차박의 경우엔 차박지에 도착해서, 트렁크의 테일게이트만 열면 그 순간 잠자리가 완성되기 때문에 훨씬 수월하다. 잠자리 자체도 바닥에서 떨어져 있어서 벌레를 싫어하는 여성과 아이들은 텐트보다 차에서 자는 걸 더 쾌적하게 느낄 가능성이 크다.
또 하나의 큰 장점은 기동성이다. 텐트를 설치하게 되면, 그곳이 베이스캠프가 되어 캠퍼는 온전히 하루를 그곳에서 보내고 와야 한다. 하지만 차박의 경우에는 선택한 곳이 마음에 안 들면 짐을 차에 싣고 이동하면 되기 때문에, 혹시 사람이 몰려와 주변이 시끄러워지거나 화장실이 멀거나, 벌레가 있거나 어떤 이유든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옮길 수 있는 기동성이 있다. 바꿔 말하면 차박을 하다 집에 가고 싶어지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차박의 가장 큰 적은 화장실이다. 풍경이 좋은 자연엔 사람도 없지만 화장실도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처음 차박을 시도하는 분께 추천하는 곳은 휴게소다. 휴게소는 대관령 꼭대기에도, 태백산 만항재에도, 홍천의 강가에도, 경주의 ‘바람의 언덕’에도 있다. 이곳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잡스러운 고속도로 휴게소가 아니다. 한적한 지방도로변에 있는 고즈넉한 곳이다. 여기서 차박을 경험해보고 조금씩 도로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지점을 추천한다.
우리 집 아이들의 “캠핑 가자”는 말은 90% 이상이 차박을 가자는 뜻이다. 어디 갈지 정하지 말고, 가다가 마음에 드는 데 발견해서 하루 지내고 오자는 탐험의 의미. 반대로 아내는 차박이 싫다는 경우가 90% 이상이다. 가서 화장실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예약하고 캠핑 가면 안 되냐는 의미. 내 경우엔 어떨 땐 차박, 어떨 땐 캠핑이 좋다. 자연에서 놀고 짐에서 자유로운 건 차박, 하지만 맛있는 걸 만들어서 먹고 2박 이상 지내고 싶을 땐 캠핑. 그러니 혹시 에스유브이가 있고 약간의 캠핑 장비가 있다면, 차박을 시도해보시라. 은근히 재미있다.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낚시든, 악기든, 오토바이든, 세차든, ‘너 좋아하는 게 뭐야?’ 라고 물었을 때 무언가 한가지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