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의 글을 읽다가 가슴이 북받쳐 벌떡 일어섰다. 한동안 서성거렸다. 투르게네프가 아니라 시인 윤동주 때문이었다.
투르게네프는 산문시도 지었다. 산문으로 쓴 이야기인데 시처럼 짧다. ‘거지’라는 작품이 있다. 길을 걷다 거지를 만났는데 마침 주머니에 돈이 없더란다. ‘미안하오, 가진 것이 없소.’ 작품 속 ‘나’는 거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괜찮습니다. 이것으로도 고맙습니다.’ 거지의 말에 “나는 깨달았다, 나도 이 형제에게서 적선을 받았다는 것을.” 아름다운 이야기다. 두 사람은 마음이 통했다. ‘나’는 거지에게 공감하고 거지는 ‘나’에게 공감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나는 궁금하다. 사람들끼리의 공감이란 정말 가능할까? 나는 거지와 처지가 다르다. 이 뿌듯한 기분이 진정한 공감이 아니라 나의 알량한 자기만족이면 어쩌지? ‘일베의 시대’에 나는 걱정한다. 공감 능력을 훈련하는 데에 이야기의 소용이 있다는 말을 들어왔다. 하지만 진정한 공감이란 것이 불가능하다면?
투르게네프도 이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산문시 ‘양배춧국’을 보자. 농부 할머니가 아들을 잃었다. 지주 마님이 위로하러 갔다. 그런데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양배춧국을 꾸역꾸역 먹고 있더란다. 마님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럴 때 어떻게 양배춧국이 목구멍을 넘어갈 수 있담!' 할머니는 울면서 말했다. ‘하지만 양배춧국을 버릴 수는 없어요. 소금을 뿌려 두었으니까요.’ 지주는 농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농부와 공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소금처럼 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드물게 산문시를 썼다. 내가 잊지 못하는 ‘투르게네프의 언덕’이라는 작품이 있다. 작품 속 ‘나’는 언덕을 걷다 세 소년 거지를 만난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세 아이를 부르지만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 자기네끼리 소곤소곤 이야기하면서 고개를 넘어갔다.” 세 아이는 ‘나’와 공감을 거부했다. 척 보기에도 처지가 달랐기 때문 아닐까. 작품 속 ‘‘나’ 는부끄러움을 느낄 뿐이다.
고독한 인간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공감이 불가능하면 연대는 가능할까. 공감이 이토록 어렵다면 공들여 이야기를 지은들 세상을 위해서는 무슨 소용이랴. 그래도 조심스럽게 희망을 품어본다. 투르게네프가 무엇을 꿈꾸었나, 윤동주가 무엇을 부끄러워했나, 요즘 사람이 짐작이나마 하는 일 역시 이야기의 힘 덕분이니.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