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창작을 권함.” 이 칼럼을 시작할 때 다루고 싶던 주제다. 처음에는 직접 간단한 코딩도 해보았다. 그러다가 챗지피티가 등장했다. ‘기계 창작’의 새 시대가 왔다. 그런데 의외다. 많은 사람이 기계 창작을 전보다 덜 반긴다. 옛날에는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은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가 부담스럽다는 분위기다.
그래도 인간이 주도권을 잃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야기를 즐기는 쪽은 인간이다. 기계가 인간보다 이야기를 더 잘 만드는 시대가 되어도, 기계는 이야기에 인간과 같은 관심은 없을 것이다.
로봇이 솜사탕을 만들고 돈가스를 튀기는 시대다. 어지간한 사람보다 음식을 잘 만든다. 하지만 로봇이 자기 음식에 군침을 흘리지는 않는다. 이야기도 그렇다.
이야기란 정보 전달 수단치고 효율이 낮다. 짧게 몇 줄로 전달할 수 있는 정보를 구름과 같은 낱말 덩어리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도 인간은 단순한 정보보다 이야기를 즐긴다. “인간은 원래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이 말을 나는 좋아한다.
하늘의 구름에서도 바닥의 얼룩에서도 사람은 사람의 얼굴을 찾아낸다. 스콧 맥클루드는 책 ‘만화의 이해’에서, 어디를 둘러봐도 사물에서 얼굴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고통에서 의미를 찾고 우연에서 플롯을 읽어낸다.
일본 판타지의 고전으로 불리는 ‘로도스도 전기’라는 작품의 뒷이야기가 있다. 오프라인에 모여 보드게임을 하고 그 내용을 그대로 글로 옮겼다는 것이다. 글로 쓰는 일만 아니라 게임의 모든 과정에서 사람은 이야기를 창작한 셈이다.
나는 ‘뱀 주사위 놀이’로 칼럼을 쓴 일이 있다.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숫자대로 이동하는 게임이다. 주사위에게는 이 게임이 무슨 의미일지 나는 가끔 궁금하다. 무작위로 수를 더하고 빼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도 우리는 역전과 추격의 드라마를 즐기고 권선징악의 교훈을 배운다.
나는 어릴 때 유리창의 빗물을 보며 몽상을 즐겼다. 물방울은 바람에 흔들리며 자란다. 그러다 너무 커지면 떨어져 사라진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야심을 품고 위대한 성공을 이뤘으나 오만함 때문에 파멸하는 영웅과 제국의 이야기를 상상했다. 이것이 그리스 고전에 자주 나오는 ‘휘브리스’의 이야기라는 것을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야기를 지어내도 저렇게 재밌게는 못하겠다.” 우리는 가끔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그 드라마를 쓰는 것은 사실 인간이다. 사람은 세상 만물에서 이야기를 찾아낸다. 주사위를 통해, 빗방울을 통해, 이제는 인공지능을 통해, 영감이 온다. 하지만 그 영감을 반기고 즐기는 것은 우리 인간뿐인 것 같다.
글·그림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