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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다시 돌아올 자리

등록 2022-08-27 14:34수정 2022-08-27 14:36

김금희의 식물하는 마음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2년여 만에 해외로 나갈 준비를 하는데 마음이 무거웠다. 호기롭게 비행기표를 샀던 5월과는 다르게 팬데믹 상황이 심해졌고, 새 단편소설을 끝내지 못하고 가는 것도 부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여행을 정말 마음 편하게 떠난 적이 있었나. 늘 일들이 말끔히 정리되지 않은 채로, 여행 동선도 제대로 못 짠 채로 출국 날짜에 등 떠밀리듯 떠나왔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더구나 식물들을 두고 가야 하는 게 걱정이다. 험한 날씨에도 싱싱하고 건강하게 여름을 나주고 있는 식물들을 보자면 집을 비웠다 돌아온 내가 맞닥뜨리게 될 비극이 벌써부터 괴로워진다.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식물호텔이 있다고 해서 에스엔에스(SNS)상으로 팔로잉하고 살펴보았다. 전문 가드너의 관리를 받을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이었지만 어떤 식물을 맡길지 고민하다가 시간을 다 보냈다. 보름 가까운 여행 기간쯤은 가뜬할 선인장이나 몬스테라 등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의 식물들이 그 특별한 케어를 원하고 있었다. 온실에서 꺼낸 뒤로 잎이 말라가고 있는 베멜하, 이미 몇 개의 개체를 말려 죽인 터라 이번에도 보내면 죄책감 때문에라도 다시는 들일 수 없을 것 같은 유칼립투스, 창가로 옮겨주었더니 마치 축포처럼 새잎을 터뜨리고 있는 피쿠스 움벨라타(휘커스 움베르타), 강연 갔던 도서관에서 선물로 받아온 온시디움. 서양란의 일종인 온시디움은 뿌리가 썩지 않게 주의해야 하기 때문에 마사에 심겨 있었다. 물을 많이 줘도 머금지 않고 모두 밖으로 흘려보내니까 미리 충분히 주고 간다는 개념은 가능하지 않았다.

이렇듯 호텔에 투숙해야 할 사연은 식물마다 구구절절했지만 내가 최종 후보로 생각한 식물은 유칼립투스 멜리오도라였다. 서촌의 식물가게에서 튼튼한 개체를 사왔지만 썩 잘 자라지도 다행히 죽지도 않은 채 2년을 버텼고 몇 달 전에야 두번째 순을 내며 쭉쭉 키를 높인 상황이었다. 물이 조금만 많거나 적으면 잎 상태로 금세 불만을 표현하는 이 예민한 식물이 과연 내가 여행을 다녀올 때까지 버텨줄까. 안 되면 정말 얘라도 호텔에 맡겨야겠다고 결심할 즈음, 구원투수가 등장했다. 늘 그렇듯 엄마였다.

“얘는 무슨 식물을 호텔에 맡겨? 내가 들여다볼 테니까 쓸데없이 돈 쓰지 마.”

“엄마가 이 더위에 어떻게 우리집을 오가, 힘든데.”

나는 사양하는 척하면서도 결국 기댈 곳은 엄마밖에 없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다. 다만 전철로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일흔이 넘은 엄마더러 오가라고 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노년의 엄마를 지켜보는 것은 많이 낯설고 불안한 일이다. 엄마는 전보다 더 느리게 걸었고 웬만하면 걷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가게 물건을 빈틈없이 정리하고 손님들 ‘니즈’에 맞게 신상품을 들여오는 열의를 여전히 보이지만, 동네에 재개발 얘기가 돌자 얼른 돼서 가게를 정리하고 싶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이제 나이가 들어 힘들다고. 그런 엄마를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나조차도 낯선 동네로 불러올리다니, 정작 나는 없고 식물들만 기다리는 텅 빈 집으로.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자기가 해줄 테니 걱정 말라고 했고 며칠 전 그 예행연습을 위해 우리집을 다녀갔다. 엄마가 온다고 하면 늘 역 출구로 마중을 나갔는데 엄마는 그날만은 그러지 말라고 내게 일렀다. 하지만 그 당부를 잊고 내가 습관처럼 마중을 나가는 바람에, 자기 기억으로 차근차근 우리집을 찾아오던 엄마는 원하는 방식의 예행연습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엄마는 자기 혼자 찾아가볼 테니 나더러는 아무 말 하지 말라며 앞장서서 아파트로 향했다. 나는 그럴 것 없이 동영상으로 남겨놨다가 길이 헷갈릴 때 보면 된다며 엄마의 뒷모습을 휴대전화로 찍기 시작했다. 며칠간 비가 호되게 내려 몸도 마음도 가라앉아 있던 날이었다.

그날 엄마는 국수에 넣을 고명까지 다 챙겨와 잔치국수를 만들어주었다. 음식들의 이름을 남몰래 좋아하고 즐길 때가 있는데 ‘잔치국수’라는 단어도 그중 하나였다. 검박하고 정겹고 활기차고 가볍고 순수한 공동체가 생각나는 말. 엄마와 나는 애호박을 많이 넣은 칼칼한 국수를 나눠 먹으면서 정말 맛있다고 맞장구쳤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발코니와 각 방에 놓인 식물들을 함께 살펴보았다.

“다 물 한번씩 주면 되는 거지?”

나는 그렇다고, 뭐 그렇게 까다로운 일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엄마에게 부탁하는 처지에 손가락을 넣어 흙의 상태를 알아보라든가, 화분을 들어보면 물이 필요한지 알게 된다든가 토를 달 수는 없었다. 수도꼭지를 틀어 호스로 고사리들에게 물을 주면서 나는 전혀 어렵지 않다고, 그냥 편하게 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엄마는 발코니를 살펴보더니 죽은 식물들이 심긴 화분을 가리키며 “이런 것들부터 싹 다 정리해야겠네” 하고 내게 가장 필요한 일을 콕 집어냈다.

나이가 이렇게 들고 독립해 나온 지 꽤 됐는데도 엄마와 만났다 헤어지는 건 여전히 마음이 스산해지는 일이다. 아무리 사회생활을 해도, 어디 가서 어떤 행세를 하는 사람이 돼도 그치지 않을 분리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 혹은 미약한 슬픔 같은 것. 그날 밤 나는 휴대전화에 남은 낮의 동영상들을 재생해보았다. 엄마는 아파트 뒷문을 통과해 벚나무와 이팝나무가 있는 길을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칠순 기념으로 친구들과 함께 쇼핑을 가서 샀다는 새 원피스를 입고, 늘 그렇듯 좀 급한 걸음으로 비 갠 뒤의 보도블록을 걸어간 엄마는 정확하게 우리집을 찾았고 “여기가 맞지? 이제 그만 찍어”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걸 여러 번 재생해 보면서 언제가 됐든, 어디에서든, 이 순간을 참 많이 그리워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런 마음을 느껴보라고 이 식물들을 다 두고 내가 잠시 떠나가 있게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금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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