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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슬슬 지겨워지는 이름이다. 여름내 비싸게 사 먹고 생색낼 수 있는 선물로도 주목받았던 청포도, 샤인머스캣. 그런데 커다란 연둣빛 포도 알맹이가 이름처럼 반짝이는 계절은 사실 여름이 아니라 찬 서리가 내리는 계절인 바로 지금이다.
언젠가부터 추석 과일 선물로 샤인머스캣이 인기를 누렸다. 흔한 사과나 배 대신 청량한 색감의 청포도 한 상자가 요즘 말로는 ‘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름의 기운이 꽤 남아있는 추석은 샤인머스캣의 맛이 절정으로 올랐을 때가 아니다. 너무 이르다. 제철이 아닌데도 명절 대목에 선물세트 판매를 위해 샤인머스캣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농가가 늘어나면서 껍질이 두껍고 다소 밍밍한 맛의 샤인머스캣에 실망하는 일도 흔해졌다. 제철의 샤인머스캣, 그러니까 서리 맞고 단맛이 제대로 든 샤인머스캣은 그야말로 꿀물이다. 산미 있고 상큼한 꿀맛 포도.
샤인머스캣의 고향은 일본이다. 1988년 품종 개량 후 200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여러 방식으로 재배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일본이 종자 등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열티 없이 재배하게 된 이른바 ‘꿀 품종’이다. 그런데도 비싼 이유는 관리하는 데 시간과 인건비가 많이 들고 씨를 없애는 절차에도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씨 없는 포도는 지베레린이라고 하는 성장호르몬 처리를 해서 씨를 없애며 샤인머스캣도 이 방법을 사용한다. 2010년 이후 인기가 급상승한 샤인머스캣은 너무 많은 농가에서 빠르게 수확하는 데만 목적을 두고 재배하는 탓에 맛이 예전 같지 않다는 평이 나온다. 11월 초·중순 빼빼로 데이(11월 11일) 즈음이 제일 맛있을 때다. 제철 과일 즐기기를 위해 ‘샤인머스캣 데이’라도 만들어야 할까.
샤인머스캣은 물론 그냥 먹는 게 제일 맛있다. 하지만 혹시라도 껍질이 억세거나 단맛 없이 밍밍한 것을 만나게 된다면 주저 없이 볶아보자. 올리브오일을 살짝 두른 프라이팬에 샤인머스캣 10~20알과 설탕 한 숟갈, 소금 약간 그리고 청포도를 발효시켜 만든 화이트와인 2~3숟갈을 넣고 1분간 볶으면 세상 향긋한 샤인머스캣 컴포트가 완성된다. 이건 잼도 아니고 소스도 아니지만 이 상태로 차가운 아이스크림이나 사과 파이 등 페이스트리에 곁들이면 너무나 고급스러운 디저트가 된다. 살짝 뭉그러진 포도알이 주는 부드러운 마법에 빠진다.
샤인머스캣은 믹서에 갈아 주스로 마셔도 좋다. 믹서에 갈 때는 소금을 한 꼬집 넣어주는 게 요령이다. 샤인머스캣은 대부분 17브릭스 이상의 당도를 가지고 있어서 단맛은 충분하다. 소금을 넣어 간이 맞으면 더 달게 느껴지고 단맛에 안정감도 생긴다. 샤인머스캣 자체의 당도가 부족하다면 설탕보다는 꿀이 정답이다. 밍밍한 포도의 향까지 꿀이 꽉 채워줄 것이다.
샤인머스캣을 오래 보관하는 요령은 페이퍼 타월로 감싸서 냉장고 박스 안에 넣어두는 것이다. 냉기를 적절히 피하면서 수분도 어느 정도 보존해주기 위한 방편이다. 이렇게 하면 1주일은 거뜬하지만 더 오래 보관하고 싶다면 얼리자. 포도를 얼리면 더 달아진다. 송이에서 알을 떼어낸 후 잘 씻어서 물기 없이 통에 담아 냉동실에 얼리면 나중에 잼으로 끓이거나 갈아서 주스로 섭취하기 좋다.
샤인머스캣은 와인을 만들기에 너무 당도가 높고 수분이 많아 일반적으로 양조용으로 사용되진 않지만, 경북 영천의 고도리 와이너리에서는 성공적으로 와인을 만들어 수출까지 하고 있다. 또 ‘써머 딜라이트’란 이름의 샤인머스캣 막걸리도 수확 철에만 한정 판매되고 있으니 청포도의 향을 좋아한다면 꼭 찾아서 마셔보길 권한다.
시인의 고향에서 청포도 익어가는 계절은 칠월이지만, 샤인머스캣이 익는 계절은 지금이다. 기억하자. 된서리를 맞아야 제대로 된 샤인머스캣이다.
홍신애 요리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