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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익숙한 속담이고, 실제로도 그렇다. 물리적인 거리가 멀면 아무래도 눈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만 그럴까. 가까운 거리, 늘 곁에 있거나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서야 먼 도시, 낯선 지역은 아무래도 정말 멀게 느껴진다. 서울 토박이인 나에게 통영은 그런 곳이었다.
그 유명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하하하>에서의 통영, 충무김밥의 도시 통영, ‘동양의 나폴리’ 통영. 이 동네를 향한 화려한 수식어는 숱하다. 하지만 지금 통영에 가야 하는 이유는 겨울의 찬 기운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입춘(2월4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바람은 차고, 찬 계절의 바닷가 음식은 남다르다.
지난 1일, 가는 겨울을 놓치기 전에 서둘러 통영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굴의 고장으로 유명해 겨울 통영 여행객들은 굴만을 목적으로 이 도시로 향하기도 한다. 다양한 해산물 외에도 꿀빵, 충무김밥 등 음식이 유명한데, 그러고 보니 이게 다일까? 소박하고 토속적인 것도 좋지만 알고 보면 통영은 낭만의 도시, 미식의 도시이기도 하다. ‘아시아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라 불리는 통영국제음악제가 매년 열릴 정도로 낭만에 적극적인 이 도시는 멋들어진 다이닝 플레이스도 갖추고 있었다.
최근 통영의 미식 플레이스로 뜨는 곳 가운데 하나가 ‘야소주반’이다. 이미 온라인에 수많은 후기들이 등장했지만, 이런 평가만으로 이곳을 판단하는 건 섣부르다. 100% 예약제로 운영하고, 그날그날 마련한 신선한 식재료를 주인장 마음대로 정성스레 내는 식당이다. 과거 야소골이라 불리던 통영시 산양읍의 외딴곳에 있다. 찾아가기도 쉽지 않은데다, 서울의 파인다이닝 식당과 비교해도 가격이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이곳을 찾아가야 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주인 가족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소담한 주택에 들어서면 계절마다 꽃이 흐드러진 정원이 객을 반긴다. 서울이 고향인데도, ‘고향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때부터 이곳에서의 특별한 경험이 시작된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고즈넉한 다실과 그날의 손님을 위한 다이닝 룸이 펼쳐진다. 와인도, 맥주도 좋겠지만 꽃 같은 이곳의 음식에는 여기서 직접 만든 막걸리가 어울린다. ‘건축가가 빚은 막걸리’는 야소주반을 진두지휘하는 김은하 대표의 남편이자, 건축가 박준우가 야소골에서 심혈을 기울인 역작이다. “통영의 해산물에 소주나 화이트 와인 같은 술만 마시는 것이 안타까워” 막걸리를 직접 빚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은은한 복숭아 향, 톡톡 튀면서도 사근사근한 산미가 생굴이나 회 같은 날음식부터 대구 스테이크, 올리브오일을 뿌린 세비체(날생선과 레몬 등을 섞은 해산물 샐러드)까지 두루두루 어울린다.
통영에서 맛보는 프렌치-이탈리안은 어떨까? 통영 시내 도남동에 있는 ‘오월’은 그 5월이 아니라 영문 ‘O’wall’이다. 2008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문을 열었을 때의 상호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것이 김현정 오너 셰프의 설명이다. 이곳 역시 찾아가기 쉽지 않고, 예약을 해야 갈 수 있어 내킨다고 방문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이러한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가야 하는 이유라면 역시 음식 맛 때문이다. 산지에서 난 신선한 재료를, 제대로 된 조리법으로 특별하게 맛볼 기회는 흔치 않다.
바다 마을에는 늘 조리했다기엔 다소 투박한 회나 조개구이 같은 음식이 흔하다. 이 또한 나름의 맛이 있지만 오월에선 그때그때 나오는 신선한 재료에 ‘셰프의 킥’이 더해진다. 첫번째 코스부터 눈과 입이 즐거운데, 그 계절에 맞는 해산물과 과일, 치즈를 얹은 타파스를 기본으로, 4~5가지의 요리를 한 접시에 담아낸 오월의 대표 요리다. 문어 감바스, 마스카르포네 치즈와 명란으로 만든 퓌레 같은, 입에 착착 달라붙은 음식들이 한가득이다. 가까운 친구의 집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 기분, 낮에 방문하면 따스한 남쪽의 햇살과 함께 통영 바다를 한가득 삼키는 기분은 겪어봐야 한다.
다양한 해산물을 활용한 오월의 요리. 백문영 제공
특별한 식사를 한껏 즐겼다면 이제 통영의 밤을 맞으러 가자. 역시 통영 하면 다찌집 아닌가? 통영의 대표적인 술 문화로 알려진 다찌는 가게 주인이 그날그날 신선한 식재료로 술안주를 내주는 것을 말한다. 우스갯소리로 ‘이모카세’(이모+오마카세)라고도 하는데, 1인당 기본 음식 가격을 내고 술을 추가로 시킬 때마다 음식이 마구마구 나오는, 그야말로 술꾼에게 최적화된 시스템이다.
항남동에 있는 ‘쌓인정’은 이름부터가 남다른데, 외관도 심상치 않다. 후미진 골목, ‘이런 곳에 술집이 있을까’ 싶은 외진 곳에 아주 작게 달린 간판만이 전부다. 이곳 역시 예약이 필수로, 날마다 시장에서 나오는 식재료를 구매해 요리하기 때문이다. 1인당 5만원에 술과 안주가 나오고, 추가로 1만원에 술을 주문하면 안주가 한 접시씩 추가된다. 애피타이저처럼 나온 달곰한 시금치 무침과 매콤 짭조름한 간장게장이 우선 입맛을 당겼다. 그리고 멍게 회, 해삼 내장, 갑오징어 등의 신선한 해산물이 이어진다. 옛날 포장마차에서나 보던 아이스박스에서 바로 꺼내 먹는 찬 소주와 맥주가 한없이 들어가니 이쯤 되면 술이 나인지, 내가 술인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다.
통영에서 전국의 크래프트 비어를 맛 볼 수 있는 스테이 겸 펍 ‘미륵미륵’. 미륵미륵 제공
실컷 먹고 마셨으면 이제 바닷바람과 알코올에 찌든 몸을 쉬러 가야 할 때다. 동호동에 있는 ‘미륵미륵 맥주호스텔’은 ‘도대체 이곳은 뭐 하는 곳일까’ 싶은 것이 매력 포인트다. 1층은 맥주 펍, 2층부터는 게스트 하우스, 3층엔 명상과 요가를 할 수 있는 넓은 거실과 작은 도서관이 마련돼 있다. “청결은 미륵미륵의 생명”이라고 말하는 김형석 대표의 말처럼, 깨끗한 수건과 매일 세탁하는 새하얀 침구가 지친 투숙객을 맞이하고, 웰컴 드링크로 맥주 한잔이 주어진다. 1층의 펍은 시끌벅적하면서도 동시에 차분한 분위기인데 곳곳에 마련한 명상 공간 때문에 그리 느껴지는 듯하다. 통영의 명물, 미륵도와 미륵산에서 딴 숙소 이름만큼, 여기저기 미륵불 로고가 있는데 정작 김 대표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다. “그저 이곳에 방문하는 모든 이들의 평온과 안정을 빌 뿐, 종교적 의미는 전혀 내포하지 않고 있다”고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미묘한 공간이지만 전국 각지에서 생산되는 크래프트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내공이 있는 곳이다.
통영 해장 맛집
통영의 밤이 길었다면, 다음날 아침은 절망스러울지 모른다. 어제를 잊고 오늘을 살기 위한 해장 맛집을 소개한다.
시원하다 못해 술이 다시 당기는 시락국
통영의 대표 시장이라고 하면 다들 서호시장을 손에 꼽는다. 각종 해산물도 이곳을 통해 들어오기 때문에 관광객은 물론 현지 사람들도 즐겨 찾는다. 사람들이 늘 들고 나다 보니 이곳에는 값싸고 맛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이 많은데, 그중 시락국(시래기국)도 있다.
서호시장에는 ‘시락국 골목’이 있을 정도로 꽤나 많은 시락국집이 한 골목에 모여 있다. 아침을 여는 시장 상인들의 속을 채워주고, 관광객의 숙취로 쓰린 속을 풀어주는 데에는 사실 시락국만한 것도 없다. ‘통영시락국’, ‘가마솥시락국집’, ‘원조시락국’, ‘훈이시락국’ 등 비슷한 가게들이 많은데, 시스템은 거의 비슷하다. 바 테이블 형식으로 된 ‘다찌’에 둘러앉으면 국밥이 바로 나오고, 테이블 위의 무생채, 멸치젓갈, 김치, 막장, 다진 마늘과 같은 각종 반찬을 뷔페식으로 떠먹는 식이다. 시락국은 통영에서는 유독 남다르다. 장어의 살을 발라 끓이거나 장어 대가리를 고아서 국물을 만들어 사골국처럼 진하고 깊은 맛을 낸다. 여기에 각자의 취향에 맞게 다진 청양고추나 간장, 산초가루를 곁들여 먹으면 속이 그야말로 시원해진다. 너무 시원해져서 막걸리를 곁들이게 되는 것이 이 시락국집들의 함정이다. 시락국밥 7000원. 원조시락국 경상남도 통영시 새터길 12-10, (055)646-5973.
통영의 해장 스테디셀러, 복국
통영에서 잡히는 유명한 생선 중 하나가 복어다. 전통시장에 가면, 시장 곳곳에서 상품성이 없는 작은 복어들을 좌판 가득 펼쳐 놓고 무더기로 판매할 정도다. 통영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이곳에선 술꾼들의 해장 스테디셀러 중 하나가 복국이다. 실컷 먹고 마실 수 있는 천혜의 땅 통영에서, 해장에 으뜸인 복국까지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가 없다.
동호동 나폴리 호텔은 통영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시장 등도 가까워 ‘관광객들의 성지’라 불리는데, 그 인근에 유명한 복국집이 있다. 성수기엔 늘 줄을 서는 ‘동광식당’은 복국, 물회, 갈치조림 등을 판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꼭 복국을 주문할 것. 맑은 국물에 미나리와 무, 콩나물과 큼지막한 복 덩어리가 들어가 있는 복지리를 한입 들이켜는 순간 지난주에 마신 술까지 깨는 기분이다. ‘관광객 맛집’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그 맛은 진짜다. 졸복국 1만4000원. 동광식당 경상남도 통영시 통영해안로 343-1, (055)644-1112.
에스프레소 한잔으로 깔끔하게
따끈한 커피 한잔으로 해장하는 이라면 동호동 동피랑마을 인근 ‘삼문당’으로 찾아가보자. 낡은 건물을 고쳐 1층에서는 커피 로스팅을 하고, 2층은 카페, 3층 옥상은 루프톱 공간으로 알뜰하게 이용한다.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은은한 커피 향이 짠 바닷바람을 개운하게 씻어낸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라테 등 일반적인 메뉴는 물론 이곳에서 직접 로스팅하고 블렌딩한 윈두로 내린 ‘삼문당 에스프레소’, ‘통영 라테’ 등을 만날 수 있다. 캡슐커피, 드립 백 커피도 함께 판매하고 있어 통영의 여운을 더 길게 느끼고 싶은 이라면 구매해 보기를 권한다. 아메리카노 3500원. 삼문당커피로스터 경상남도 통영시 중앙로 168 2층, (055)645-9092.
백문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