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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차를 마신다. 매일 마음이 흔들린다는 말이다.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바람이 불면 그 결에 맞춰 유연하게 춤을 출 줄 알아야 한다. 다만 매 순간 흔들린다면 숨차고 몸과 마음이 고되기 때문에 가만히 멈추고 고요해지는 시간도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고요해지고 싶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바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누군가는 산책이나 요가·명상 등을 하고, 때론 음악을 듣거나 게임을 하는 등 자신만의 ‘진정제’를 사용해야 한다. 나에게는 그게 바로 차를 마시는 거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짚고 넘어가자면 ‘차’라는 명사보다는 차를 마시는 행위인 동사, ‘차 마시기’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먼저 차를 우릴 때 필요한 몇 가지 다구를 준비한다. 찻잎을 넣은 다관(차를 우릴 때 사용하는 주전자)이나 개완(뚜껑·몸통·받침으로 구성된 다구)에 끓인 물을 붓고 30초에서 1분 정도 가만히 기다린다. 숙우(물을 식히거나 차를 여러 잔에 옮겨담기 위한 다구)에 찻물을 따른 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잔에 따른다. 이 일련의 과정이 바로 나의 진정제다. 마실 차의 종류와 날씨, 기분에 맞춰 다구를 고르는 것부터 수선스러운 머릿속이 가지런해진다. 찻물을 숙우나 찻잔에 부을 때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마지막에 똑똑 떨어지는 영롱한 물방울 소리는 마음의 귀를 씻어준다. 차가 품은 그윽한 향기와 맑은 맛이 무거운 고민을 가볍고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덕에 가빴던 숨은 잔잔하게 잦아든다.
차를 우리고 따르고 마시는 과정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 이 시간 만큼은 오로지 이 행위에만 집중한다. 그래야만 파문이 일어난 마음을 가라앉히는 효과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을 ‘멀티’로 하는 것보다는 하나의 행위가 품은 원류의 기쁨에 몰입할 수 있어서다. 무엇보다 큰 즐거움은 차를 마시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도구가 공예품이라는 사실이다. 차와 공예, 마음의 치유까지 고루 누릴 수 있는 차 마시기를 권하며 단출한 나의 차 살림을 소개한다.
묵직한 발효차를 우리는 ’소사요 흑유’(왼쪽)와 싱그러운 녹차를 우리는 노산도방의 백자 다관.
나를 차 마시는 생활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공예다. 2018년 겨울, 공예트렌드페어를 관람하다 토림도예의 바닷빛 개완을 보고 마음을 빼앗겨 일단 덜컥 구입한 것. 그때만 해도 집에는 파리 출장 때 사온 유럽식 홍차밖에 없어 일단 그걸 중국식 다구인 개완에 우려 마셨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배님이 보이차를 선물해주셨고 토림도예 개완과 함께 나의 차 생활이 시작되었다. 기물에 먼저 매료돼 차를 만나고 인생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된 듯 그 즐거움을 차곡차곡 써나가고 있다.
토림도예 개완은 깊은 푸른색에 먼저 눈이 갔지만 사용하면 할수록 손에서 느끼는 맛이 일품이다. 얇은 두께의 입구는 찻물을 따를 때 단단히 잡아야 하는 개완의 사용법에 최적화돼 안정적이고, 뚜껑의 손잡이 윗부분에 홈을 파서 뚜껑을 살짝 비켜 잡고 찻물을 부을 때 손가락을 고정하기 편하다. 개완을 처음 사용할 때 뜨거운 물이 든 뚜껑과 입구를 잡는 것이 두려울 수 있는데 토림도예 개완은 금세 익숙해진다.
잡는 자세가 안정적인 만큼 개완을 기울이는 각도와 팔 동작이 편안하고 우아해서 이제 제법 많아진 다구 중에서도 여전히 자주 사용한다. 녹차, 청차, 보이차 등 종류도 가리지 않고 모든 차를 본연의 맛으로 선명하게 내려주기 때문에 사실 이 개완 하나만으로도 차 생활은 넉넉하고 거뜬하다. 입구가 넓으니 찻잎이 물속에서 피어나는 모습을 감상하기에도 그만이다. 차 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분이라면 첫 다구로 개완을 추천한다.
이제부터는 찻주전자, 차호를 예찬할 차례다. 다관이라고도 하는데 성인 주먹만 한 작고 앙증맞은 주전자다. 개완처럼 찻잎을 넣고 물을 부어 차를 우리는 데 사용한다. 재질과 디자인, 크기가 다양해 고르고 소유하는 재미가 크다.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지 않으면 다관이 차고 넘치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샘솟는 물욕을 자제하며 5년간의 차 생활 동안 다섯 개의 다관을 가졌다. 1년에 하나씩 늘어난 셈인데 모두 좋아하지만 이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건 검은색과 흰색 다관 두 개다.
‘소사요 흑유’는 나의 첫 다관이다. 깊고 따뜻한 검은색은 마치 우물같고 차 맛이 맑다. 다관은 재질에 따라서 같은 차라도 깔끔해지거나 미세하게 단맛이 나는 등 맛이 달라진다. 개인적 경험이지만 나에게는 분명하게 느껴지고 이렇게 다관을 비교해가며 차를 즐기는 것도 차 생활의 재미다. 두 번째 다관은 노산도방 홍성일 작가님이 빚은 백자 다관이다. 유려한 곡선의 맵시가 곱고 하얀 한복을 입은 소녀 같다. 그래서인지 싱그럽고 담박한 맛을 품은 녹차나 달콤하고 화사한 향의 백차를 우릴 때 잘 어울린다. 앞서 소개한 소사요 흑유 다관은 묵직한 무이암차나 발효차에 적합하다는 게 나의 의견이다.
직접 구입하거나 선물받은 찻잔들. 오른쪽 맨 아래에 있는 윤세호 작가의 양이잔을 요즘 가장 애용하고 있다.
내가 가진 다구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건 찻잔이다. 찻잔은 모으는 재미도 선사한다. 차오르는 다구에 대한 물욕을 찻잔 수집으로 타협하는 것이기도 하다. 찻잔을 구입할 때는 디자인별로 한 개만 사는 게 나만의 방식이다. 똑같은 찻잔이 없이 모두 다른 디자인과 재질의 찻잔으로 모으고 골라 쓰는 재미를 즐긴다. 요즘 손이 자주 가는 찻잔은 윤세호 작가님의 양이잔이다. 양쪽 면에 작은 귀가 손잡이처럼 달린 형태로 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는 오래된 디자인인데 여전히 품위와 귀여움이 함께 느껴진다. 푸른 유약이 매력적인 양이잔은 요즘 자주 마시는 봄 햇녹차의 여린 물색과 잘 어우러진다.
소설가 한승원은 산문집 <차 한 잔의 깨달음>에서 “마음이 흔들릴 때 차를 마신다”라고 했다. 내가 매일 차를 마시는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다. 아름다운 공예품에 빠져서 기물을 가지고 놀 듯이 시작했지만 매일 마시다 보니 차를 마시는 행위의 기쁨과 몰입감을 알게 됐다. 누구나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 차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주저하지 않길 바란다. 규칙도 정답도 없으니 일단 차와 차 도구를 간소하게 마련해 물을 끓이고 향과 맛을 음미하는 순간을 스스로 선물하길 권한다. 고요한 잉여의 시간을.
글·사진 박효성 리빙 칼럼니스트
잡지를 만들다가 공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우리 공예가 가깝게 쓰이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가꿔주길 바라고 욕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