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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무렵 오이를 다섯 개나 한꺼번에 먹고 체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태어난 나는 오이를 못 먹는다. 사실 못 먹기보단 싫어한다는 표현이 더 맞다. 너무 싫어서 오이를 안 먹으려고 알레르기가 있다고 거짓말을 한 적도 있다. 생 오이의 즙에서 피어나는 비릿한 냄새는 나를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할 정도다.
최근 오이 특유의 향과 쓴맛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유전자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밝혀지면서 그동안 유난 떠는 인간으로 오해 받았던 억울함이 조금 해소됐다. 방송을 통해 ‘오싫모’(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게 있다는 걸 당당하게 밝혀보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등산을 할 때 오이와 감자 중 무엇을 가지고 갈 거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감자라고 대답하는 사람이다.
오이는 수분을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여름 채소다. 꼬불꼬불한 줄기와 이파리가 위로 자라올라 조롱조롱 맺히는 초록의 결실. 우리나라 오이는 진녹색 껍질이 도톰한 취청오이와 연초록의 다다기오이 이렇게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취청오이 중엔 가시가 크게 맺혀 있고 뾰족한 가시오이가 유명하고 다다기오이는 취청에 비해 허여멀건 하기 때문인지 백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때는 취청 계열의 오이가 거의 사라져 찾아보기 어려웠고 껍질이 연하고 말랑한 다다기오이가 유행이었으나 최근 몇년 사이 우리 식탁에 토종 바람이 불면서 취청, 가시오이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또한 개량종으로 미니오이, 스포츠오이 등이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다.
오이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수분감이다. 오이를 좋아한다는 사람 대부분은 생으로 먹는 오이를 즐기며 그 특유의 ‘껍질 쪽 다르고 씨 쪽 다른’ 이중적 식감과 속으로 들어갈수록 느껴지는 단맛, 그리고 무엇보다 줄줄 흐르는 풍성한 수분을 커다란 매력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이 요리로 가장 유명한 것은 물기를 쫙 뺀 오이지다. 오이에서 가장 중요한 물을 빼면 새로운 맛이 생긴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수분을 제거한 오이는 나처럼 오이 향에 민감한 사람도 먹을 수 있다.
자그마하지만 단단한 다다기오이가 시장에 나오면 한 거리를 산다. 50개다. 손바닥으로 문지르면서 흐르는 물에 살살 씻어준다. 소금으로 박박 문질러 씻는 건 겉이 단단하고 가시가 있는 가시오이나 가능하다. 다다기오이는 표면에 상처가 나면 금세 무르고 까맣게 변해버리므로 상처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씻는다. 소금과 설탕을 각각 4컵씩 섞어 오이에 켜켜이 뿌리고 화이트와인이나 소주·청주 등 15도 정도의 술 한 병(750㎖)을 붓고 마른 홍고추를 몇 개 같이 넣어준다. 하루 이틀 지나면 뒤집어서 액체가 오이에 골고루 스며들도록 해준다. 계속 오이 위치를 바꿔가며 일주일 정도 실온에 두었다가 모든 오이가 전체적으로 쪼글쪼글해지면 절인 물을 버리고 오이를 꼭 짜서 냉장 보관한다. 이렇게 하면 여름은 물론이고 겨울까지도 골마지가 생기지 않는 맛있는 오이지가 된다. 이 오이지 두어 개를 꺼내서 물에 씻고 다진 마늘, 고춧가루, 참기름에 무쳐 먹거나 시원한 얼음물에 담가 생오이 채, 토마토, 배 등을 썰어 넣고 오이지 냉국을 해도 좋다. 진한 콩국에 악센트로 강렬한 오이지 고명도 백미다.
초록빛 오이가 가을을 맞으면 ‘노각’이란 이름을 얻는다. 노랗고 포동포동한 겉모습에 다소 푸석한 속살로 변하는 것이 마치 사람의 삶과 같다. 하지만 노각은 초록 시절의 오이가 가지지 못한 감칠맛과 단맛을 어마어마하게 담고 있으며 유연한 살성은 젊은 시절 뜨거운 태양을 잘 버텨낸 찬사처럼 여겨진다. 생오이를 먹지 못하는 나는 노각의 자연스러운 향이 더 친근하다. 중년, 말년이라 쓰고 황금기라 읽는다.
요리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