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문득 생각난…
요즘 나는 ‘피고’다. 어느 높으신 언론인께서 소송을 거시었다. 덕분에 10개월째 법정을 들락거린다. 재판날, 내 순서를 기다릴 땐 방청석에 앉아 다른 재판을 구경한다. 강도·절도·사기·성추행·명예훼손 …. 세상은 넓고 사건은 많다.
피고인에 대한 변호사의 반대신문을 듣고 있으면 사건 개요가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요점 정리가 잘 되어서다. 쓴웃음을 짓게 하는 내용들이 많다. “피고인은 그날 고향 친구들을 만난 반가움에 평소 주량의 2배가 되는 소주 3병을 마시었죠?” “네.” “그리고 2차에서 생맥주 3000cc를 또 마시었죠?” “네.” “피고인은 그 뒤의 상황을 전혀 기억 못하고 있죠? “네.” 불법주거침입 어쩌구 범죄 사실이 한참 이어진 뒤 …. “피고인은 마음속 깊이 반성하고 있죠?” “네.” “피고인은 그 사건 이후 술을 한 방울도 입을 안 대고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죠?” “네.”
성추행 혐의로 피소된 전직 정치인의 횡설수설을 듣기도 한다. “(방청석에 앉은 피해 여성을 손가락질하며) 저런 여자는 돈을 줘도 안 건드립니다. 안 그렇습니까 판사님?” 운이 좋을 땐 분쟁에 휩싸인 대중문화 스타도 만난다.
죽도록 심심한데 주머니가 텅 비었는가. 가까운 법원에 놀러 가시라. ‘사건 관람료’는 무조건 공짜. 에어컨도 있으니 피서도 된다. 한번 들어가면 무제한 관람이다. 세상은 요지경, 팍팍 실감해 보시라.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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