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문득 생각난…
운전대를 잡자마자 장대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뿌연 물보라 사이로 앞차의 뒤창에서 이상한 글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트렁크에 사람이 타고 있습니다.” ‘트렁크에 사람이 있다고, 왜?’ 갑자기 머릿속에 복잡한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온갖 추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가기 시작했다. 그 끝을 봐야만 했다. 조용히 그 차의 꽁무니를 쫓았다. 빨간 신호등 때문에 몇 번을 놓칠 뻔했지만 기어코 따라잡았다. 이윽고 언덕 위에 핏빛 슬레이트 지붕이 덮인 집 앞에 차가 멈췄다. 주변은 온통 잡풀이 우거진 공터였다. 내 심장의 고동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드디어 차에서 사람이 내렸다. 머리의 가운데를 고속도로처럼 깎은 사내였다. 그는 흘끔흘끔 주변을 살피더니 트렁크 문을 열었다. 잠시 후 트렁크에서 찐득찐득한 녹색의 덩어리가 영화 <링>의 주인공처럼 기어 나와 부풀어 올랐다. 앗! 사람이 되어간다. 소름이 주삿바늘처럼 돋았다. “빵빵”, “빵빵” 나를 향해 무언가 발사된다. 번쩍! 사방의 차들이 나를 향해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폭풍우 치는 날, 나는 한순간 도로의 무법자가 되었다. 앞 차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도 간혹 그 차의 글자들이 생각나곤 한다. 여름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짧은 추리, 소름 끼치는 상상은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는 멋진 피서법이라고!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