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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는 짧고 망신은 길다

등록 2007-12-12 18:41수정 2007-12-12 18:45

<브리짓 존스의 일기> (2001)
<브리짓 존스의 일기> (2001)
[매거진 Esc] 김은형의 웃기는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2001)

두 남자가 싸움을 한다. 한 남자는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전형적인 영국 귀족 스타일. 다른 한 남자는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대형 출판사의 편집장. 의상은 대체로 랄프 로렌풍.

둘은 어떻게 싸울까. 러셀과 칼라일을 인용하는 치열한 논쟁? 적의 심장에 우아하게 칼 끝을 겨누는 <삼총사>식 결투? 아니다. 시정잡배의 주먹질도 이보다 없어보일 수는 없다. 시정잡배야 틈틈이 뒷골목에서 체력단련이라도 하지, 책상 물림들의 발길질은 질러봐야 허리 위를 못올라가고 엉겨붙는 꼴은 무슨 체위를 구사하는 게 아닐까 헷갈리며, 급기야 서로의 얼굴을 손으로 잡아뜯는 장면에서는 차라리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워, 라고 소리치고 싶다. 두 사람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브리짓을 놓고 삼각관계를 벌이는 마크 다아시(콜린 퍼스)와 다니엘 클리버(휴 그랜트)다.

휴 그랜트, 또는 그가 전속처럼 출연해온 제작사 워킹타이틀로 대표되는 영국식 코미디의 특징은 소심함이다. 전전긍긍하며 눈치 보고, 궁시렁거리면서도 고상한 척하는데 쪼잔함을 숨기지 못하는 캐릭터가 휴 그랜트가 늘 구현해온 ‘영국 신사’다. 게으르고 겁 많은 그의 주변에는 미국식 코미디의 거친 난장판이 없다. 구호로 만들자면 ‘폭력이 아니라 뒷담화를!’ 정도가 될까? 그런데 예외적으로 ‘액숀’ 씬이 등장한 게 바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이 장면이다.

하지만 따져보면 이 격투장면 역시 영국식 코미디의 자장 안에 놓여있다. 개싸움을 하던 신사들은 밀고 당기기를 하며 식당에까지 들어가는데 테이블에 엎어지면서 벙 찐 얼굴로 앉은 손님들에게 이들은 일일이 정중히 사과하며 주방장의 생일 케이크가 옮겨져 올 때는 잠시 옷을 추스리고 생일 축하 노래에 동참하기도 한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자 바아로 뒷통수 가격. 좀스럽고 유치하며 문득 비열해지기까지 한다. 이건 멋있는 것도 아니고 잔인한 것도 아니다. 다만 웃길 뿐이다.


김은형의 웃기는 영화
김은형의 웃기는 영화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소방서 봉을 타고 내려오는 르네 젤위거의 팬티 씹은 거대한 엉덩이나 그가 술병 나발을 불며 ‘올 바이 마이셀프’를 부르는 장면이 자주 꼽히지만 나는 생전 덤벨 한번 안 들어볼 것 같은 휴 그랜트가 드물게도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를 펼쳐주신 이 장면을 꼽겠다. 게다가 다른 남자 배우들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으면 않을수록 멋있는 액션 장면이 나오는데 이건 거칠어질수록 추해지는 결과를 낳으니 진정한 프로페셔널이 아니면 도전할 수 없는 액션이 아닌가. 특히나 이 장면은 체력, 근력 안되는 데 성질만 터프한 수많은 아저씨들에게 욱하면 스타일만 구긴다는 걸 다큐멘터리처럼 리얼하게 보여줌으로써 하찮은 폭력 발생을 예방하는 공공 질서 확립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도출되는 이 영화의 교훈. ‘가오’는 짧고 망신은 길다. 연일 이어지는 송년회 술자리를 달리고 계신 수많은 남성 독자 여러분들.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을 잊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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