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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물방울’에 닭살이 돋았습니다.
와인을 소재로 한 아기 다다시의 원작만화 이야기입니다. 저는 대략 4권까지 보았는데, 솔직히 등장인물들의 와인평을 읽으며 약간 토가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이런 말들이 번쩍거리는군요. “파워풀하고… 그러면서 녹아내리는 듯한 단맛과 톡 쏘는 듯한 신맛이 확 밀려오는 느낌이야. 중후한 기타와 묵직한 드럼으로 감싸는 듯한… 그야말로 퀸의 보컬의 달콤하고도 허스키한 목소리를… 뭐랄까 클래식 같지만 그렇지도 않아. 이건 보다 모던한 느낌. 역시 퀸이에요.”
‘신의 말장난’을 더 감상해보겠습니다. “칠흙 같은 어두움이군… 이 와인에는 악마 같은 어둠이 깃들어 있어. 리히르트 스트라우스의 가곡에 맞춰 관능적으로 춤추는 살로메. 그래요. 실로 이 와인은 관능 그 자체. 그것도 퇴폐가 낳는 피 냄새가 나는 관능. (중략) 오오 이 얼마나 악마적 퇴폐인가, 이 얼마나 감미로운 도취인가.”
이번 호 요리면에선 음식에 관한 표현들을 다뤘습니다. 맛보는 혀보다, 말하는 혀가 몇 배 더 어렵다는 걸 실감합니다. 패션이나 헤어스타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표현은 어떻습니까. “앞으로는 매니시한 느낌의 헤어가 뜰 것 같아요. 시크하면서도 패셔너블한, 딱히 보이시하다고 표현할 수 없지만 페미닌 룩에 한정되지 않은 스타일이 유행을 이끌지 않을까요?” 11면 만화 <로맨스 워크샵>을 보니 이런 느끼한 ‘작업 대사’도 있군요. “누나의 눈은 재작년 캐나다에서 본 밤하늘 같아.” 웨엑~.
언어의 빈곤, 표현의 한계를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수사’가 잘 진척이 안 됩니다. 살인사건 수사가 아니라, 말이나 글을 다듬고 꾸며서 좀더 정연하게 한다는 뜻의 ‘수사’(修辭)입니다. 누군가 ‘수사반장’이 되어 적확하고 아름다운, 이왕이면 죽이기까지 하는 ‘수사’들을 척척 골라줬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여, 좀 담백하게도….
고경태/ <한겨레> 매거진팀장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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