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이것은 유행이 아니다
발에 차는 땀 때문에 얇은 운동화도 부담스러워지는 계절…슬립온 슈즈와 쾌적하게 여름나기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누구 탓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어느새 네댓켤레로 늘어난 슬립온(slip-on) 슈즈 이야기다. 여름이면 핫팬츠에 원피스에 원없이 신어야겠다 마음먹었는데, 더워질수록 이 녀석과 점점 멀어진다.
‘슬립온 슈즈’에 홀딱 반한 것은 지난해였다. 트렌드로 치자면, 최신의 것은 아니었지만 볼수록 간단명료한 이 신발이 참 마음에 들었다. 이 유형의 신발은 윗부분에 끈과 같은 고정장치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굽이 있는 남성 구두의 한 유형으로 분류되나, 요즘은 남녀 가리지 않고 신는다. 그저 발을 쑥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신발. 그래서 예전 서양 사교 모임에서는 ‘신발 끈도 매기 싫어할 정도로 게으르다’ 또는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고 여겨 슬립온 슈즈를 신고 나타나면 비아냥거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점점 멀어진다는 녀석은 굽이 있는 슬립온 슈즈는 아니다. 3~4년 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슬립온 슈즈는 가벼운 소재의 천 등으로 만든, 구두보다는 운동화나 단화에 가까운 신발이다. 요즘 서울 시내 젊은이들이 많은 거리를 가보면, 이 신발을 볼 확률은 거의 100%이다. 편안한 착화감에, 다양한 무늬와 소재로 만들어져 패션 아이템으로도 손색없다. 남녀 가릴 것 없이 발목이 살짝 드러나는 바지나 반바지와 함께 신으면, 간단하게 스타일링 완성이다.
이 열풍의 중심에 선 브랜드는 ‘탐스 슈즈’이다. 앞서 언급한 장점에, 이 신발을 사면 신발 없는 제3세계 어린이에게 신발 한 켤레를 기부하는 ‘개념찬’ 브랜드로 유명세를 탔다. 이른바 ‘원 포 원’(One for One)을 허풍이 아닌, 실천으로 보여준 이 신발의 등장이 내심 고맙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탐스 슈즈는 슬립온 슈즈가 아닌 다른 유래를 가졌다. 바로 아르헨티나의 전통 신발인 ‘알파르가타’에서 비롯된 것이다. 창업자 블레이크 마이코스키가 ‘다른 누군가를 위한 신발’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은 곳이 바로 아르헨티나였던 것이다. 슬립온 슈즈를 표방해 비슷한 디자인의 신발이 쏟아진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원찮다. 값이 더 싼데도 말이다. 거창하게들 이런 현상을 가리켜 ‘가치 소비’, ‘착한 소비’라고 한다. 본인 역시 일간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신으면 신을수록 이유는 딴 데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가볍고 귀여운 신발의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 없는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그런데 왜 멀어지느냐고? 여름날 발바닥에 땀 나도록 발발거리며 지내고 있다. 진짜 땀이 난다. 벗으면 장판에 발바닥이 딱 달라붙는다. 해결책은 있다. 양말을 신을 것! 그런데 여름 원피스에 양말 신고 슬립온 슈즈는 아니지 않은가? 다행히 천으로 된 슬립온 슈즈는 중성세제를 물에 풀어 담갔다가 헹군 뒤 바짝 말려 신으면 된다고 한다. 장마가 오기 전에 당장에 해치워야 할 일이다. 찔리는 사람들 여기저기 보인다. 빨아서 신자.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다. 설마 ‘너만 그렇게 신어온 거야!’라고 지탄할 텐가? 아무튼 빨리 이 녀석들과 해우하고 싶다. 오늘은 꼭 세탁을!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이정연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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