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 수필름의 민진수(40) 대표
[매거진 esc] 인간 반전
세무사에서 영화 제작자로 변신 <내 아내의 모든 것>으로 홈런 친 수필름 민진수 대표
하마터면 귀에 딱지가 앉을 뻔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짚을 때마다 그는 “아직 젊으니까”라는 문장을 후렴구처럼 즐겨 말했다. 마흔살을 살짝 넘긴 나이. 어쩌면 20대 청춘이 보기엔 그다지 젊지 않은 나이일지도 모른다. 그는 젊게 살아야지, 최면을 거는 게 아니라 진짜 자신이 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전히 안정보다 마음이 끌리는 길로만 가고 있다.
영화사 수필름의 민진수(40) 대표는 요즘 어느 때보다 즐겁다. 형 민규동 감독이 연출하고 수필름이 제작한 <내 아내의 모든 것>이 전국관객 400만명을 돌파하며 장기 흥행을 기록중이기 때문이다. 영화 일을 시작한 지 9년 만에 얻은 긍정적인 결과다.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수필름 사무실에서 민 대표를 만났다. “8, 9년 전보다 경제적으로는 훨씬 어려운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지는 않아요. 영화계는 나름 보람과 큰 희망이 있는 곳이에요. <내 아내의 모든 것>이 잘돼서 기분 좋은 건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수필름이 흥행성 면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게 됐다는 거예요. 다음에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거니까 그 점이 제일 뿌듯해요.”
그는 영화사 대표가 되기 전 세무사로 일했다. 남들이 흔히 택하는 기업체 입사 대신 작더라도 자기 사업을 해야겠다는 소박한 꿈을 안고 세무사 자격증을 따냈다. 조언은 없었다. 빌딩 곳곳에 붙어 있는 ‘세무사’ 간판을 바라보며 막연히 ‘저기라면 내 사업을 한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짐작했을 뿐이다. 자격증을 따고 인맥도 없이 무작정 개인 사무소를 차렸다.
“개업을 바로 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에요. 거래처, 말하자면 인맥을 많이 만들려면 일단 경험이 있어야 하거든요. 나이가 들어야 인맥도 생길 텐데, 저는 20대 젊은 나이에 바로 개업을 해버렸죠.” 멋모르고 뛰어든 세무사 일은 즐겁고 안락했다. 마침 1990년대 말은 막 벤처붐이 일기 시작한 시절. 아이티(IT) 회사가 우후죽순 생기고, 젊은 인력들이 대거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젊은 세무사가 할 일이 어느 때보다 많았다. 그 시절, 형의 소개로 엔터테인먼트 회사나 배우 매니지먼트 회사의 세무 회계 일을 많이 맡았다. 민진수 대표의 눈에 영화계 사람들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영화계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열정의 크기가 부러웠다.
형 민규동 감독이 차기작 연출에 고전하고 있을 무렵, 불현듯 자신이 형의 고민을 해결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아티스트니까 창작에 전념하고, 나는 비즈니스를 책임지면 어떨까.’ 형은 의외로 난감해했다. “영화사는 네가 생각하는 사업과 다르다”며 안정적인 업계에 머무르기를 권했다. 그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세무사로 일한 지 만 5년, 일의 재미가 슬슬 떨어지고 있었다. 세무는 남의 사업의 조력자 같은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작더라도 내 일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민규동 감독)이 고전할 때
도움되고 싶었어요.
형이 난감해했죠” 벌여놓은 세무사 사무소를 접을 생각은 없었다.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연예인도 아닌데, ‘민진수’라는 가명을 만들었다. 하나의 휴대전화로 두 업계의 전화를 받으려니, 어쩔 수 없었다. 민병수(본명)를 찾으면 세무사로, 민진수를 찾으면 영화인의 정체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영화 일을 시작하면서 고생도 진탕 해봤다. 경쟁이 거의 없는 업계에서 일하다 경쟁이 치열한 곳, 스타가 존재하는 곳에서 일하다 보니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내 의지만으로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 세무사는 열정을 다해 일하면 그에 대한 결과가 정확한 반면 영화 일은 그렇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한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 형과 다툼도 생겼다. “제작자는 감독을 설득해야 하고, 감독은 제작자를 설득해야 하니까, 서로의 입장 차이 때문에 논쟁이 생기더라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한발만 슬쩍 영화에 걸치고 있었지, 완벽한 업종 전환은 아니었다. 잠시 몸담았다 돌아가려던 마음을 접은 것은 <앤티크>를 제작하면서부터다. 2, 3년쯤 이중생활을 하다 보니 다른 영화인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영화에 쏟아붓는데, 이런 식으로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벌여놨던 사업을 정리했다. 이제는 민병수라는 실제 이름보다 ‘민진수’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세상을 누비고 다닌다. 이제 영화계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슬슬 감이 잡힌다. 회계나 세무 지식을 프로듀서에게 전수해주고, 판권 계약의 노하우를 알려주고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시스템이 아직 마련되지 않은 영화계에 안정적인 시스템을 제안할 수 있다면 더 큰 바람이 없을 것 같다. “5년 뒤 무슨 일 할지 모르겠지만
파란만장하게 일하는 게 맞아요.
아직 젊으니까요” 그는 여전히 에너지가 들끓고 있다. 군대 가기 전 자취방 보증금을 털어 문집을 만들었던 열정, 세무사로 활동하던 시절 시나리오 작가 학원에 다니며 남몰래 창작에 몰두했던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는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타입이 아니다. 과감히 앞을 향해 발을 뻗는다. 세무 강사로 일하고 싶을 땐 수많은 학원에, 세무 관련 서적을 내고 싶을 땐 출판사에 무작정 원고를 보내 꿈을 이뤘다. “아홉번 실패해도 한번 성공하면 되는 거니까 부끄러움이 없어요.” “앞으로 또 어떤 일을 하게 될진 모르지만, 한 5년은 영화 일을 더 하게 될 것 같아요. 영화계는 파란만장하고 굴곡이 세서 더 재미있고 할 일이 많다는 느낌이에요. 나는 아직 젊으니까,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곳보단 파란만장한 곳에서 일하는 게 맞아요. 크레디트를 보고 쑥스러워하지 않을 때까지 해야죠.” 안정보단 열정의 크기를 믿고 달려가는 삶. 그의 말투가 유난히 빠르고 단호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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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되고 싶었어요.
형이 난감해했죠” 벌여놓은 세무사 사무소를 접을 생각은 없었다.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연예인도 아닌데, ‘민진수’라는 가명을 만들었다. 하나의 휴대전화로 두 업계의 전화를 받으려니, 어쩔 수 없었다. 민병수(본명)를 찾으면 세무사로, 민진수를 찾으면 영화인의 정체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영화 일을 시작하면서 고생도 진탕 해봤다. 경쟁이 거의 없는 업계에서 일하다 경쟁이 치열한 곳, 스타가 존재하는 곳에서 일하다 보니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내 의지만으로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 세무사는 열정을 다해 일하면 그에 대한 결과가 정확한 반면 영화 일은 그렇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한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 형과 다툼도 생겼다. “제작자는 감독을 설득해야 하고, 감독은 제작자를 설득해야 하니까, 서로의 입장 차이 때문에 논쟁이 생기더라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한발만 슬쩍 영화에 걸치고 있었지, 완벽한 업종 전환은 아니었다. 잠시 몸담았다 돌아가려던 마음을 접은 것은 <앤티크>를 제작하면서부터다. 2, 3년쯤 이중생활을 하다 보니 다른 영화인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영화에 쏟아붓는데, 이런 식으로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벌여놨던 사업을 정리했다. 이제는 민병수라는 실제 이름보다 ‘민진수’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세상을 누비고 다닌다. 이제 영화계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슬슬 감이 잡힌다. 회계나 세무 지식을 프로듀서에게 전수해주고, 판권 계약의 노하우를 알려주고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시스템이 아직 마련되지 않은 영화계에 안정적인 시스템을 제안할 수 있다면 더 큰 바람이 없을 것 같다. “5년 뒤 무슨 일 할지 모르겠지만
파란만장하게 일하는 게 맞아요.
아직 젊으니까요” 그는 여전히 에너지가 들끓고 있다. 군대 가기 전 자취방 보증금을 털어 문집을 만들었던 열정, 세무사로 활동하던 시절 시나리오 작가 학원에 다니며 남몰래 창작에 몰두했던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는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타입이 아니다. 과감히 앞을 향해 발을 뻗는다. 세무 강사로 일하고 싶을 땐 수많은 학원에, 세무 관련 서적을 내고 싶을 땐 출판사에 무작정 원고를 보내 꿈을 이뤘다. “아홉번 실패해도 한번 성공하면 되는 거니까 부끄러움이 없어요.” “앞으로 또 어떤 일을 하게 될진 모르지만, 한 5년은 영화 일을 더 하게 될 것 같아요. 영화계는 파란만장하고 굴곡이 세서 더 재미있고 할 일이 많다는 느낌이에요. 나는 아직 젊으니까,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곳보단 파란만장한 곳에서 일하는 게 맞아요. 크레디트를 보고 쑥스러워하지 않을 때까지 해야죠.” 안정보단 열정의 크기를 믿고 달려가는 삶. 그의 말투가 유난히 빠르고 단호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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