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20년간 사무실의 투명인간 고졸 여직원에서
대학강사 겸 작가로 반전한 권영임씨
대학강사 겸 작가로 반전한 권영임씨
남성 위주 중공업 회사에서
19년6개월 커피타며 타이핑
IMF 때 회사 박차고 나와 진학 마흔살에 스무살 청춘을 다시 산 여자가 있다. 스무살 무렵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청춘이다. 가난하고 자식 많은 집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장녀 부채의식이 남달랐다.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두말 않고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졸업 후 곧장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훌쩍 옮겨 남자 사원들이 득시글거리는 중공업 분야에서 19년6개월간 커피 타고 타이프 치며 투명인간처럼 살았다. 당시만 해도 고졸 여사원에게 주어진 일거리는 너무 하찮았다. 하루 종일 커피 심부름만 하다가 집에 돌아가는 날이 적지 않았다. “20대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학력차별에 성차별, 게다가 지역차별까지. 서른살이 빨리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서른살이 되던 해 나에게 반지를 선물해 줬죠. 무사히 잘 견뎌냈다는 의미로. 그때는 지금 누리고 있는 인생이 나에게 아예 없을 줄 알았어요. 마흔살 넘어 대학에 가고 강의까지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권영임(52)씨의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꿔놓은 건 온 국민이 악몽처럼 기억하고 있는 아이엠에프였다. 모든 게 불안정하던 그때, 그녀는 스스로 사표를 던지고 감옥 같았던 직장을 과감히 뛰쳐나왔다. 20여년 만의 탈출. 직장생활을 하며 오랫동안 가족 뒷바라지를 하고 살았으니 이제는 한번쯤 자신을 위해 살아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깊이 남아 있던 학력 콤플렉스를 풀어내기 위해, 또 소설을 쓰고 싶다는 비밀스러운 꿈을 이루기 위해 숭의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다. 그녀의 나이 마흔두살에 벌인 최초의 일탈이었다. 돈은 따로 벌지 않았다. 직장생활 20여년 끝에 손에 쥔 퇴직금은 약 5000만원. 공부에 유난히 목말랐던 여자는 누구보다 열심히 학교생활에 매진했다. 보고서 하나를 써낼 때도 수많은 책과 자료를 섭렵하며 논문 수준의 두툼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를 거쳐 동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대학과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장학금은 거의 놓친 적이 없다. “20년 가까이 학력차별에 시달리며 살아서 그런지 공부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콤플렉스가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 같아요. 물론 콤플렉스를 극복했을 때에 한해서 말이에요.” 어릴 적부터 소중히 키워온 글에 대한 애정이 콤플렉스를 이겨냈다. 학창시절 소설 읽는 것을 즐겼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창원 산업단지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는 지방 문학회 동인으로 활동하며 수필가로 등단했다. 스물여덟살 무렵, 서울 여의도로 발령받은 뒤에는 대학 평생교육원이나 문화센터를 들락거리며 인문학 강좌를 열심히 들었다. 1993년 우연한 기회에 직장 내 성차별을 고발하는 책도 한 권 펴냈다. 그녀의 첫 책 <미스 김, 시집이나 가지?!>(여성사)는 세간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전문직 여성들의 성차별 고발 서적은 여러 권 나왔지만, 평범한 사무직 여사원이 써내려간 성차별 고발 에세이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마침 90년대 초에는 직장 내 성차별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책을 펴내고 난 뒤 직장에서의 생활은 전보다 훨씬 힘들어졌다. “나는 우리 회사 사람들의 이야기를 고발한 게 아니라 당시 직장인 남성들의 일반적인 이야기를 한 것뿐인데, 당시 몸담고 있던 직장의 상사들은 자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다뤘다고 못마땅해하더라고요.”
당시엔 남자 사원들의 사회의식이 정말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 “여자들에게는 투표권을 반 표만 줘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남자도 있었다. 그런 직장에서 오래 근무를 하다 보니 그는 지금도 어디 가서 여직원이 커피를 내오려고 하면 한사코 차를 안 마시겠다고 우긴다. 은행이나 기업체를 방문했을 때 꽃이 단정하게 가꿔져 있으면, 예쁘다는 생각보다 ‘사무실 미화를 누가 했을까’ 하며 보이지 않게 일했을 손이 먼저 궁금해진다.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저걸 가꾸었을 사람의 얼굴이 궁금해지는 거죠.”
그는 어느새 쉰넷의 나이 지긋한 여자가 되었다. 마흔살에 스무살 청춘을 다시 산 그녀는 요즘 대학에서 문예창작과 언어지도를 가르치고, 출판사 기획위원으로 활동하며 소설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욕심내지 않고 한달에 100장가량 꾸준히 소설을 써내려간다. 자신의 스무살 청춘 시절을 정리하는 자전소설은 이미 탈고한 상태. 내년 초에는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출판할 예정이다. 정식 등단 경로를 거치는 대신 자신을 믿어주는 출판사에서 책을 내기로 마음먹었다. 그 결단도 사실 쉽지만은 않다.
“문단의 경력은 학벌과 비슷해요. 유명한 공모전을 통해 등단하면 그 이력이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니죠. 저는 그런 경로를 통해 등단하지 않았지만 꾸준히 잘 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나가고 싶어요.” 어찌 보면 소설가로서 그녀는 또 고속도로가 아니라 오솔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평생을 ‘이력서’와 함께 싸워온 그녀가 또다시 ‘이력서’와 싸울 결심을 한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예전처럼 여전사로 살지는 않을 것 같다. 밤새 책을 보고 느지막이 일어나 글을 쓰는 삶.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노동의 감옥에서 뛰쳐나오고 나니 그녀는 천생 ‘야행성 동물’이었다.
자신에게 꼭 맞는 생활 리듬을 찾아 일하고 있는 그녀는 여전히 스무살 청춘처럼 수줍게 웃는다. 손톱에는 유난히 튀는 빨간 매니큐어가 예쁘게 칠해져 있다. 스무살 무렵에는 단정하게 커피를 내오느라 감히 발라보지 못했을 색감의 매니큐어. 발갛게 물든 그 손톱이 참 예쁘고 생기발랄하다.
※ 이번회로 ‘인간반전’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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