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찌. 박미향 기자
[매거진 esc] 인간 반전
80년대 중반 꽹과리에 꽂혀 한국에 와 밴드와 우쿨렐레 연주하며 느리게 살아가는 일본 아티스트 하찌
1954년생 뮤지션 아저씨 하찌. 환갑을 앞둔 나이이지만 여전히 20~30대 젊은이들과 어울린다. 그 그림이 어색하지 않다. ‘하찌와 애리’ 밴드도 20대와 꾸렸지만 우쿨렐레 레슨이나 그가 자주 즐기는 술자리도 젊다. 그러고는 혼자 사는 일산의 집으로 향한다. 자유 만끽이다. 싱글은 아니다. 도쿄에 예쁘게 지은 집이 있고 아내와 두 딸이 살고 있다.
6년째 홀로 한국에 나와 살지만 사이가 나빠서는 아니다. 지난해에는 22살 큰딸이 놀러와 한달 반을 즐겁게 지냈다. 파티하며 술 마시고. 두 딸의 10대 시절에는 안주 요리를 만들어 함께 저녁을 즐겼을 뿐 반항기에 시달린 기억이 없다. 하찌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다. “직감으로” 직진해온 삶이 준 선물이다.
“정신이 젊어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젊은 세대하고만 사귀고 있다. 일본에서도. 외모야 나이들었지만 마음이 늙지 않는데 비결은…모르겠다.” 그 기원이 된 반전은 초등학교 6년이었다. 남자친구는 없고 여자아이들과만 어울리고, 공부는 제법 하지만 어른들이 시키는 말을 아주 잘 듣는 아이였다. 너무 소극적이라 걱정한 어머니가 그를 심리연구소에 보냈다. 자기최면으로 성격을 개조하는 곳이었다. “효과가 너무 좋아서 자기 의지만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직감적으로, 본능적으로 자기 앞길을 여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에서 명성 얻고 있을 때
사물놀이 매력에 푹 빠져
지금은 우쿨렐레 연주에 분주 그 이전부터 음악과 친했던 건 아니다. 할머니가 보낸 바이올린 레슨은 끔찍했다. 상처라고 기억될 만큼 싫었다. 두번째 반전이 중학교 2학년 때 벌어졌다. 신주쿠의 백화점에서 열린 밴드 공연을 보다가 “직감적으로” 드럼에 꽂혔다. 밴드를 찾아가 무작정 드럼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서 학교는 내팽개치고 드러머 아저씨 집을 드나들었다. “불량 학생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지만,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남들이 보기에 완전 끝장이었다.” 빨갛게 염색한 머리에 오렌지색 셔츠, 금빛으로 반짝이는 단추가 붙은 감색 재킷을 입고 거리를 누볐다. 학교도 중퇴했다. 그 덕분이겠지만 스무살에 록밴드 ‘칼멘 마키 오즈’를 결성했다. 이 밴드는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렸고, 나이에 비해 돈도 많이 벌었다. “돌이켜보면 그래서 인생에 오만했다. 이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밴드의 인기로 여운을 즐기던 80년대 중반 세번째 반전을 발견했다. 도쿄에서 사물놀이 공연을 보고 꽹과리에 꽂혔다. 드럼에 반했듯 타악기의 비트에 유난히 민감한 그였다. 인도에서 한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를 공항에서 만나 “한국으로 가겠다”고 통보했다. 런던과 뉴욕을 즐겨 찾았지만 서너달을 넘겨본 적이 없던 그가 1년3개월 동안 첫 한국 생활을 보냈다. 즐거웠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이미 확보해 놓은 것들을 챙기며 새로운 선택을 할 텐데 난 그러지 않았고, 할 줄도 몰랐다. 한국에서의 삶을 선택함으로 잃은 건 일본에서의 명성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가 공사판에서 일해야 할 정도로 생활에 쪼들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남들을 원망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놓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망상에 빠져 살았다. 10년 가까이 세상을 피하고 도망치면서 내 속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히키코모리라고 하던가. 완전 정신없었다.” 한국 머무는 동안
명성 잃으며 슬럼프
밴드 만들면서 활기 되찾아 90년대 들어 강산에 음반의 프로듀싱을 하면서 한국을 오고갔지만 자신이 느끼기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전인권의 곡을 프로듀싱하면서 문득 자신의 이름을 내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2006년 ‘하찌와 티제이(TJ)’ 밴드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긴 터널에서 벗어났다. “더이상 내 안에 갇혀 있을 수 없어 바깥으로 나왔을 때, 비로소 낙관적으로 된 듯싶다.” 자기 이름을 되찾으면서 음악과 행복을 다시 누리기 시작했다. ‘하찌와 애리’ 밴드는 2집을 준비중인데 그보다 유별나 보이는 건 국내에서 조용히 일기 시작한 ‘우쿨렐레 열풍’의 진앙지라는 점이다. 3년 전에 시작한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가르치고 다니느라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한 스케줄이다. “우쿨렐레는 작아서 가지고 다니기도 좋지만 소리가 예뻐서 좋다. 나를 구출, 구원해주었다.” 나이에 연연하는 삶을 살지 않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은 우쿨렐레를 닮아 보인다. 보기에 부담스럽지도 않지만 스스로 부담을 느끼며 살지 않는다. 40년째 술을 매일이다시피 마시지만 자동제어장치가 생겨 과음을 하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생겨났다. “완전 외롭다”고 하지만 그 고독이 있어 즐겁다고 하고, “30년 살았으니 충분하다”고 하는 결혼 생활이지만 짐이라고 느끼지도 않는다. 자신이 자유롭게 살았으니 딸들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훈계할 요량은 전혀 없다. 다만 “또 어떤 직감으로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결코 변하지 않을 게 하나 있다면 음식 사랑이다. 15년 전, 강산에를 인터뷰했을 때 본 적도 없는 하찌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강산에는 하찌와 음식을 먹으면 고통스럽다고 했다. 아주 천천히 씹으며 반찬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즐거워하느라 도통 밥 먹는 속도를 맞출 수가 없다는 거다. 그러면서 어찌나 소식인지 모르겠다고. 그런데 그걸 보면서 행복을 얻는 방법에 대해 깨달은 게 있다고 했다. 하찌는 딸이 요리사가 된 건 음식 만들기도 먹기도 좋아하는 자기 탓일 거라고 한다. 느릿느릿, 그러나 맛나게 먹는 음식처럼 그는 나이도 느리게 느리게 먹고 있다. 유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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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 잃으며 슬럼프
밴드 만들면서 활기 되찾아 90년대 들어 강산에 음반의 프로듀싱을 하면서 한국을 오고갔지만 자신이 느끼기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전인권의 곡을 프로듀싱하면서 문득 자신의 이름을 내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2006년 ‘하찌와 티제이(TJ)’ 밴드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긴 터널에서 벗어났다. “더이상 내 안에 갇혀 있을 수 없어 바깥으로 나왔을 때, 비로소 낙관적으로 된 듯싶다.” 자기 이름을 되찾으면서 음악과 행복을 다시 누리기 시작했다. ‘하찌와 애리’ 밴드는 2집을 준비중인데 그보다 유별나 보이는 건 국내에서 조용히 일기 시작한 ‘우쿨렐레 열풍’의 진앙지라는 점이다. 3년 전에 시작한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가르치고 다니느라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한 스케줄이다. “우쿨렐레는 작아서 가지고 다니기도 좋지만 소리가 예뻐서 좋다. 나를 구출, 구원해주었다.” 나이에 연연하는 삶을 살지 않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은 우쿨렐레를 닮아 보인다. 보기에 부담스럽지도 않지만 스스로 부담을 느끼며 살지 않는다. 40년째 술을 매일이다시피 마시지만 자동제어장치가 생겨 과음을 하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생겨났다. “완전 외롭다”고 하지만 그 고독이 있어 즐겁다고 하고, “30년 살았으니 충분하다”고 하는 결혼 생활이지만 짐이라고 느끼지도 않는다. 자신이 자유롭게 살았으니 딸들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훈계할 요량은 전혀 없다. 다만 “또 어떤 직감으로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결코 변하지 않을 게 하나 있다면 음식 사랑이다. 15년 전, 강산에를 인터뷰했을 때 본 적도 없는 하찌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강산에는 하찌와 음식을 먹으면 고통스럽다고 했다. 아주 천천히 씹으며 반찬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즐거워하느라 도통 밥 먹는 속도를 맞출 수가 없다는 거다. 그러면서 어찌나 소식인지 모르겠다고. 그런데 그걸 보면서 행복을 얻는 방법에 대해 깨달은 게 있다고 했다. 하찌는 딸이 요리사가 된 건 음식 만들기도 먹기도 좋아하는 자기 탓일 거라고 한다. 느릿느릿, 그러나 맛나게 먹는 음식처럼 그는 나이도 느리게 느리게 먹고 있다. 유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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