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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에서 우도까지 30년…인연이란 묘한거야

등록 2012-11-07 17:13수정 2012-11-14 10:53

칠레에서 시작된 30년 인연으로 동반자가 된 손미경(맨 오른쪽)씨와 이레네(맨 왼쪽) 그리고 이레네의 두 딸. 황희연 제공
칠레에서 시작된 30년 인연으로 동반자가 된 손미경(맨 오른쪽)씨와 이레네(맨 왼쪽) 그리고 이레네의 두 딸. 황희연 제공
[매거진 esc] 인간 반전
지구 반바퀴를 감은 인연의 끈
30년 전 칠레에서 만나 우도에서 동업자가 된 한국과 칠레 여인 손미경·이레네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우도(牛島)라는 이름이 붙은 곳. 성산 일출봉에서 배를 타고 15분 거리에 있는 우도는 어느덧 제주도에서 꼭 들러야 할 필수 관광지가 되었다. 걸어서 한 바퀴를 휘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섬이지만 제주의 이국적 아름다움을 집약해놓은 듯한 우도, 그중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모래사장으로 유명한 산호해수욕장에 가면 이채로운 펼침막 하나가 눈에 띈다. ‘칠레 현지인이 직접 만든 칠레 전통만두 엠빠나다. 우도에서만 맛볼 수 있습니다.’

작은 트럭을 아담하게 개조한 스낵카 안에서 이국적인 외모의 칠레 아주머니 이레네(47)가 엠파나다를 만들고 있다. 주문하면 즉석에서 기름에 튀겨 주는데, 맛도 좋고 한 끼 식사로도 부족함이 없다. 칠레 산티아고를 떠나온 지 1년밖에 안 된 이레네는 한국말이 서툴다. 그래서 매니저이자 사장인 손미경(52)씨가 주로 주문을 받는다. “잘게 썬 고기와 양파에 칠레에서 공수해온 향신료 코미노와 오레가노를 넣고 속을 만들어요. 거기에 올리브열매, 건포도, 삶은 달걀을 곁들이죠. 맛도 새롭지만 안으로 기름이 스며들지 않게 만두피를 만드는 게 맛의 비결입니다. 한번 드셔보세요~. 그 맛에 반할 거예요.”

이레네의 두 딸 발렌티나(11)와 소피아(9)가 하교하는 시간이면 반나절 장사가 끝난다. 손씨가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려오는 시간. 그 사이 이레네가 스낵카에서 홀로 손님을 맞으며 간식을 준비한다. 두 여인의 손발 맞추기도 진풍경이거니와 도무지 섬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손씨의 지적인 풍모도 이채롭다. 산티아고에서 시작해 30년지기가 된 이들의 삶을 보면 ‘데칼코마니’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지구 정반대편에서 태어났지만 질긴 인연으로 이어진 두 여인의 ‘운명’이 제주 우도에 이색적인 엠파나다 가게를 만들어냈다.

손씨는 20대 초반에 결혼해 두 딸을 낳았고,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이민을 다룬 드라마를 보다가 호기심이 발동해 남편에게 “이민을 가고 싶다”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남편이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도 재밌겠다며 곧바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남미 아르헨티나로 행선지를 정하고 짐을 쌌다. 그런데 직항편이 없어 잠시 들른 칠레 산티아고에서 두 사람은 얼떨결에 짐을 풀었다. 1984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산티아고는 한번 살아보고 싶을 만큼 다정하고 이국적인 도시였다.

황희연 제공
황희연 제공
1984년 무조건 떠난 이민
가사도우미로 고용해
20여년 동고동락

손씨의 나이 26살, 남편의 나이 30살. 둘째딸이 막 돌을 넘긴 무렵이었다. 연고도 없고, 준비된 사업 아이템도 없었다. 그 무렵 이민자들이 흔히 그랬듯 손씨 부부도 손대기 수월한 의류사업을 시작했다. 현지 손님을 호객하는 칠레 언어(스페인어)를 외우느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낯선 외국어로 소리를 지르는 긴장된 나날이 이어졌다. 23살의 이레네를 만난 게 그 무렵이다. 칠레 시골마을에서 13남매의 중간으로 태어난 이레네는 손씨 집안의 잡무를 돌봐주는 가정부이자 두 딸의 유모 역할로 취직했다. 손씨의 사업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의류업으로 시작해 현대자동차 부품과 액세서리 수입, 가라오케 스타일의 고급 레스토랑, 차량에 천연가스 엔진을 장착해주는 사업 등 다채로운 사업에 손을 대서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했다. 일이 잘 안 풀리면 이레네의 월급이 몇 달씩 밀리기도 했지만, 그럴 때도 이레네는 군말 없이 살림을 꾸려주었다. 잡채, 매운탕, 잔치국수 등 한국 음식을 잘 만들고 성품도 좋은 이레네를 현지 한국인들이 스카우트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레네는 끝까지 손씨 곁을 떠나지 않았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레네가 애지중지 키운 손씨의 두 딸은 현지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국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이레네는 느지막이 결혼해 자신의 두 딸을 키웠다.

2008년, 둘 사이에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손씨의 남편이 갑자기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두 딸을 한국에 보내놓은 손씨는 칠레에서 더이상 혼자 살고 싶지 않았다. 칠레는 외로웠고, 서울은 갑갑했다. 마침 제주도에 터를 잡은 언니가 우도 토박이 남자를 소개해주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우도에 놀러 갔다가 우도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남자는 품이 넓고 선량했다. 그와 함께 우도에서 새 생활을 시작했다. 그 무렵 손씨의 둘째딸이 직장일로 칠레에 갔다가 걱정스런 소식을 전해왔다.

손씨가 2008년 귀국한 뒤
잠시 헤어졌다가
우도에서 칠레 전통만두
파는 스낵카 함께 운영

“잘 살고 있으리라 여겼던 이레네가 이혼을 하고 두 딸과 어렵게 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맘이 안 좋아서 걱정을 하던 차에 불현듯 우도에 와서 같이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전화를 걸어 이레네에게 우도행을 제안했죠.”

손씨가 비용을 전부 부담하고 지난해 가을 이레네 가족을 우도로 불렀다. 이번에는 손씨가 본의 아니게 이레네 딸들의 유모 역할을 맡았다. 발렌티나와 소피아의 초등학교 입학 수속부터 등하교 뒤치다꺼리, 이레네의 한국말 수업까지 모두 손씨 몫이 되었다.

“나 혼자라면 안 왔을 텐데 두 딸과 함께 가는 거니까, 더구나 미경씨 곁이니까 바로 좋다고 했죠. 우도에 와서 살다 보니 경치도 좋고 생선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좋긴 한데, 바람이 너무 세서 지진이 나면 어쩌나 걱정이 돼요.”

‘바람 걱정은 해도 지진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손씨는 자연스레 이레네의 경제적 독립을 걱정하고 있다. 칠레만두 엠파나다 아이디어는 그래서 나왔고, 스낵카 반응이 좋아 지금은 산호해수욕장 근방에 가게 터를 물색하고 있다. 손씨 집 부근에 빈집을 구해 이레네 식구의 새 터전도 마련해놓았다. 30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고용인과 피고용인으로 만난 두 사람은 이렇게 우도에서 친구 같은 동반자로 살고 있다. “전생에 뭐가 있지 않고서야 이런 인연이 따로 있을까 싶어요.”

이제 손씨의 바람은 단 하나다. 이레네에게 좋은 한국 남자를 소개해주어 자기처럼 새 가정을 꾸리게 하는 것. 이레네 역시 한국 남자가 싫지 않다. “두 딸을 사랑해줘야 하는 게 첫째 조건, 성실하고 부지런한 게 둘째 조건이에요. 또 술을 많이 먹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국 남자들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시더라고요.” 손씨의 새 남편이 떠준 다랑어 회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이 아이처럼 까르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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