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에서 시작된 30년 인연으로 동반자가 된 손미경(맨 오른쪽)씨와 이레네(맨 왼쪽) 그리고 이레네의 두 딸. 황희연 제공
[매거진 esc] 인간 반전
지구 반바퀴를 감은 인연의 끈
지구 반바퀴를 감은 인연의 끈
황희연 제공
가사도우미로 고용해
20여년 동고동락 손씨의 나이 26살, 남편의 나이 30살. 둘째딸이 막 돌을 넘긴 무렵이었다. 연고도 없고, 준비된 사업 아이템도 없었다. 그 무렵 이민자들이 흔히 그랬듯 손씨 부부도 손대기 수월한 의류사업을 시작했다. 현지 손님을 호객하는 칠레 언어(스페인어)를 외우느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낯선 외국어로 소리를 지르는 긴장된 나날이 이어졌다. 23살의 이레네를 만난 게 그 무렵이다. 칠레 시골마을에서 13남매의 중간으로 태어난 이레네는 손씨 집안의 잡무를 돌봐주는 가정부이자 두 딸의 유모 역할로 취직했다. 손씨의 사업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의류업으로 시작해 현대자동차 부품과 액세서리 수입, 가라오케 스타일의 고급 레스토랑, 차량에 천연가스 엔진을 장착해주는 사업 등 다채로운 사업에 손을 대서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했다. 일이 잘 안 풀리면 이레네의 월급이 몇 달씩 밀리기도 했지만, 그럴 때도 이레네는 군말 없이 살림을 꾸려주었다. 잡채, 매운탕, 잔치국수 등 한국 음식을 잘 만들고 성품도 좋은 이레네를 현지 한국인들이 스카우트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레네는 끝까지 손씨 곁을 떠나지 않았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레네가 애지중지 키운 손씨의 두 딸은 현지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국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이레네는 느지막이 결혼해 자신의 두 딸을 키웠다. 2008년, 둘 사이에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손씨의 남편이 갑자기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두 딸을 한국에 보내놓은 손씨는 칠레에서 더이상 혼자 살고 싶지 않았다. 칠레는 외로웠고, 서울은 갑갑했다. 마침 제주도에 터를 잡은 언니가 우도 토박이 남자를 소개해주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우도에 놀러 갔다가 우도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남자는 품이 넓고 선량했다. 그와 함께 우도에서 새 생활을 시작했다. 그 무렵 손씨의 둘째딸이 직장일로 칠레에 갔다가 걱정스런 소식을 전해왔다. 손씨가 2008년 귀국한 뒤
잠시 헤어졌다가
우도에서 칠레 전통만두
파는 스낵카 함께 운영 “잘 살고 있으리라 여겼던 이레네가 이혼을 하고 두 딸과 어렵게 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맘이 안 좋아서 걱정을 하던 차에 불현듯 우도에 와서 같이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전화를 걸어 이레네에게 우도행을 제안했죠.” 손씨가 비용을 전부 부담하고 지난해 가을 이레네 가족을 우도로 불렀다. 이번에는 손씨가 본의 아니게 이레네 딸들의 유모 역할을 맡았다. 발렌티나와 소피아의 초등학교 입학 수속부터 등하교 뒤치다꺼리, 이레네의 한국말 수업까지 모두 손씨 몫이 되었다. “나 혼자라면 안 왔을 텐데 두 딸과 함께 가는 거니까, 더구나 미경씨 곁이니까 바로 좋다고 했죠. 우도에 와서 살다 보니 경치도 좋고 생선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좋긴 한데, 바람이 너무 세서 지진이 나면 어쩌나 걱정이 돼요.” ‘바람 걱정은 해도 지진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손씨는 자연스레 이레네의 경제적 독립을 걱정하고 있다. 칠레만두 엠파나다 아이디어는 그래서 나왔고, 스낵카 반응이 좋아 지금은 산호해수욕장 근방에 가게 터를 물색하고 있다. 손씨 집 부근에 빈집을 구해 이레네 식구의 새 터전도 마련해놓았다. 30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고용인과 피고용인으로 만난 두 사람은 이렇게 우도에서 친구 같은 동반자로 살고 있다. “전생에 뭐가 있지 않고서야 이런 인연이 따로 있을까 싶어요.” 이제 손씨의 바람은 단 하나다. 이레네에게 좋은 한국 남자를 소개해주어 자기처럼 새 가정을 꾸리게 하는 것. 이레네 역시 한국 남자가 싫지 않다. “두 딸을 사랑해줘야 하는 게 첫째 조건, 성실하고 부지런한 게 둘째 조건이에요. 또 술을 많이 먹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국 남자들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시더라고요.” 손씨의 새 남편이 떠준 다랑어 회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이 아이처럼 까르르 웃는다. <한겨레 인기기사>
■ 특검, ‘MB는 불법 증여’ ‘아들은 조세포탈’ 결론
■ 단일화 경쟁력, 문재인이 안철수 역전
■ 외신기자가 본 문재인과 박근혜의 차이는?
■ 이인제 “노무현은 부패 혐의 쫓겨 자살”
■ 이보다 찌질할 순 없다…말년병장 ‘포복절도’ 군생활기
■ “8년간 게임폐인으로 살면서 젊은 세대와 통했죠”
■ [단독] 특검, 청와대 숨겼던 ‘대필 비서관’ 찾았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