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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이 주는 평온

등록 2014-12-10 20:41수정 2014-12-11 10:30

사진 박미향 기자
사진 박미향 기자
[매거진 esc] 국수주의자 박찬일
젓가락은 참 재미있는 도구다. 밥은 숟가락이나 젓가락 모두 쓸 수 있지만 국수는 오직 젓가락으로만 먹을 수 있다. 그래서 군대에서 라면 먹을 때조차 숟가락을 쓰는 것은 이 집단의 이질성을 상징한다. 젓가락은 일종의 확장된 신체로 보는 견해가 있다. 손가락처럼 ‘가락’으로 끝나는 어미로 의미심장하다고들 한다. 젓가락은 손가락이 하지 못하는 세밀한 작업도 해낸다. 김치를 찢는 일이 대표적이다. 맨손으로 하면 두 손을 써야 김치를 찢을 수 있지만, 한 벌의 젓가락을 쓰면 어렵지 않게 한 손으로도 가능하다. 물론 요즘 젊은 치들은 불가능한 일이다. 통김치를 찢어 먹어본 경험이 적은데다가 젓가락 자체의 사용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포크는 젓가락을 대체하고 있는 중이다. 포크는 찍고 고정시키는 기능이 강하다. 반면 젓가락은 찍는 기능도 있지만, 대개는 들어 올리고 옮기는 기능이 우월하다.

현대 한국의 밥상은 점차 포크를 쓰는 요리가 점령하고 있다. 국수 요리에서도 그렇다. 포크로 먹는 스파게티가 한국의 국수시장에서 발을 넓히고 있다. 아이들 급식에서는 반찬으로까지 등장한다. 필자가 일하는 식당에서는 스파게티에도 젓가락을 낸다. 물론 포크도 구비하고 있지만, 우선 젓가락을 제공한다. 흥미로운 실험이 벌어진다. 주문한 스파게티가 나오면 손님들은 자연스럽게 젓가락을 들어 식사한다. 포크를 달라고 주문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어린아이가 있거나 아주 젊은 축들이 주로 포크를 요청하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대다수는 제공된 젓가락으로 ‘원래 맞는 도구인 듯’ 스파게티를 먹는다.

그런데 스파게티의 소스는 젓가락과 아주 궁합이 좋은 것 같지는 않다. 필자의 식당에서는 스파게티의 소스를 묽게 하지 않으며 소스 자체의 양도 적다. 이탈리아식으로 면이 주인공인 스타일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스의 양이 적으니까 젓가락으로 먹을 때 수월하지 않다. 소스가 적고 뻑뻑해서 면 자체가 돌돌 뭉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역시 포크가 제격이다. 포크로 면을 말고 감아올리면 딱 적당한 양이 한입 분량으로 말린다. 반면 국수는 많은 양의 국물이 있거나 윤활한 묽은 소스가 있을 때 제 기능을 잘 발휘한다. 국물이 묻어서 미끄러운 면을 포크로 감으면 줄줄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이렇듯 도구와 문화는 서로 적절히 쓰임새를 맞추면서 발전해온 것이라는 깨달음을 준다. 그런데 필자가 일부러 스파게티에 젓가락을 꾸준히 제공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손님들이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젓가락을 쥐면 우리는 여유가 생긴다. ‘내 음식을 먹는다’는 심리적 안정을 갖는 듯하다. 젓가락 한 벌만 차고 있으면 우리는 굶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학창 시절, 도시락 대신 젓가락만 들고 오는 녀석들도 있었다. 젓가락은 밥을 굶기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러나 포크와 나이프는 여전히 불편한 어떤 객체다.

스테이크를 제공할 때도 필자는 미리 주방에서 작게 잘라서 담고 젓가락을 쓰도록 유도한다. 희한한 것은 누구도 그런 방법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젓가락을 줘야 할 음식에 포크와 나이프를 내면 아무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도구에 마음이 담겨 있을 리 없지만, 우리는 그 무생물의 대상에까지 마음을 심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미끈한 국수 한 다발을 들어 올리면서 젓가락은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힘내라 젓가락!

박찬일 요리사·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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