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은 면 요리가 유명하다. 내 기억으로 가락국수가 먼저다. 우동이라고 부르던, 일제 강점기의 면식(麵食) 관행이 오래 살아남았다. 중앙선은 원주, 경부선은 대전이었다.
그 원류는 당연히 일본이다. 시코쿠 지방 사누키우동이 바로 대전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대전역을 기억하듯, 일본인들은 다카마쓰의 역전 우동을 전설로 친다. 다카마쓰역에는 그 전설적인 우동 가게가 아직도 역 안에 있다. 연전에 한 그릇 먹어봤다. 뭐, 그저 그런 맛. 시내에서 제대로 만드는 우동에 비해 훨씬 못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우동의 역사를 잊지 못한다. 역전 내지는 플랫폼 우동이 어디 맛으로 먹었나, 일종의 향수 음식이지. 뭐 이런 식이다.
대전역에서는 조미료와 멸치 국물로 맛을 낸 육수에 이미 삶아두어서 팅팅 불어버린 면을 급히 말아 냈다. 그것이 뭐 그리 맛있었을까. 기차 경적을 울리고 차장 아저씨들은 호각을 불며 탑승을 재촉했다. 이미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하고(그래도 우동이야말로 국물 맛인데), 국물을 급히 들이켜느라 입천장이 홀랑 까졌다. 기차 시간에 쫓기며, 바삐 한 그릇의 우동을 밀어 넣는 관습이 당시 식민지 조선에 이어진 것이다. 조선 땅에 경부철도를 비롯한 철도 가설이 이어지고 일본의 수탈이 심해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일본식 플랫폼 우동문화로 이식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당연히 그것을 한국식 국수문화로 알았다. 국물을 넣은 ‘가케우동’을 ‘가끼우동’이라고 발음하면서 ‘각기’ 한 그릇 먹는 것인 줄 착각했으니까. 지금도 대전역에서는 가락국수를 판다. 한국화된 맛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먼 일제의 유물로 어른거린다.
대전역이 ‘0시50분’과 플랫폼 가락국수가 전부는 아니다. 역 앞에는 이름난 칼국수 집이 있다. 신도칼국수에 가본다. 역시 국수로 ‘전설’이 된 집. 엄청난 양과 말도 안 되게 싼값, 그리고 추억의 맛을 선사한다. 가게 안에는 개업 초기인 50년대부터 당대의 국수 그릇이 벽에 붙어 있다. 지금도 양이 많은데, 과거의 그릇에 비하면 약소(?)하다. 당시 사람들의 먹성은 엄청났다. 간식은커녕 끼니도 자주 거르던 시절이니 먹을 수 있을 때 곰처럼 먹고 비축했다. 언제 이렇게 또 푸짐한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싶었을 것이다. 이 집 국수에서는 향수가 배어난다. 그 시절의 밀가루 냄새다. 그래서 더 식욕을 자극한다. 지금이야 물론 최상 등급 밀가루를 쓰는데도 2등급, 3등급 밀가루로 만들던 거친 밀가루 음식의 향이 살아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국수 먹을 때는 그 플랫폼 국수와 군대 시절에 부대 앞에서 급히 삼키던 짜장면과 중학교 시절 쉬는 시간 안에 해결하던 매점의 퉁퉁 불은 라면과 정독도서관에서 팔던 싸구려 가락국수를 들이켜던 습관이 그대로 살아 있다. 급히 먹지 않으면 국수 맛이 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내 또래나 오랜 세월을 거친 분들도 나 같은 국수 먹는 습관이 있을 터. 아이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국수의 속도전’이었음을. 이제 대전역에서는 가락국수를 사 먹을 만큼 오래 정차하는 열차도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유물 같은 그 국수 그릇을 찾는다. 음식은 그래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생애의 유전자 같은 것.
박찬일 요리사·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