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공유하기
‘버추얼’(가상의)이란 영단어를 접할 때면 자미로콰이의 ‘버추얼 인새니티’를 흥얼거리곤 합니다. 1996년이 아니라 엊그제 나온 최신곡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세련된 노래도 노래지만, 뮤직비디오는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제이 케이(보컬)가 소파만 덩그러니 놓인 방에 들어서는데, 바닥이 마구 움직이는 겁니다. 제이 케이는 그 위를 걷고 춤추며 노래합니다. 거리감과 공간감이 뒤틀린 그 방을 보며 ‘가상현실이 구현된다면 이런 공간일까?’ 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상현실의 존재감을 제대로 느낀 건 그로부터 3년 뒤인 1999년 개봉한 영화 <매트릭스>에서입니다. 모피어스는 주인공 네오에게 알약 두 개를 내밉니다. 파란 약을 먹으면 이전처럼 안락한 삶으로 돌아갈 것이고, 빨간 약을 먹으면 진실을 마주하게 될 거라면서요. 네오는 빨간 약을 먹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삶이 거대한 가상현실(매트릭스)이었고, 진짜 현실은 암울한 묵시록의 세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극장을 나서며 ‘이 세상이 매트릭스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지더군요.
영화에서나 보던 가상현실의 세계가 실제 세계로 부쩍 다가왔습니다. 당장 스마트폰 하나만으로도 ‘버추얼 리얼리티’(VR) 영상을 즐길 수 있습니다. 파도를 타는 서퍼가 되기도 하고, 뉴욕 링컨센터의 발레리나 분장실로 갈 수도 있죠. 이번 esc 커버스토리에서 본 것처럼 가상현실이 본격화하면 세상은 유토피아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헤드셋을 벗는 순간 펜트하우스가 낡은 고시원으로 돌아오듯 현실은 더욱 초라해지겠죠.
삶이 고달플수록 가상현실로 도망가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도피가 영원할 순 없습니다. 결국엔 진실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상이 아닌 진짜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려 애써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께 묻습니다. 파란 약 드시겠습니까, 빨간 약 드시겠습니까?
서정민 esc팀장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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